난 원래 흐리멍텅한 존재

in #busy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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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업을 하던 때에는 포토샵을 열어 누끼따는 일을 자주 했었다. 사진의 원하는 부분만을 잘라내는 일이다. 누끼를 따기 위해 사진을 확대하다 보면 잘 안 보이던 픽셀이 보이면서 사진에 나타난 경계들이 흐릿해진다. 배경과 예쁜 접시의 경계선은 모호해지고 바둑판 같은 픽셀의 합은 알아보기 힘든 이미지로 흐리멍텅해진다.
본질은 외피로 둘러쌓인 단단한 내핵 같은 것이 아니다. 그곳에 가기 위해 안으로 파고들면 본질이라 할 수 없는 어떤 흐리멍텅한 경계를 보게 된다. 본질은 본질을 발현시키는 내적 원리이지만, 그렇게 다른 본질과의 관계를 허물기도 한다.
공각기동대(고스트 인 더 쉘)의 메이저는 사람일까 기계일까. 뇌만 사람의 것이고 나머지는 기계의 힘을 빌렸으니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업무분담만은 확실하다. 영화에서는 직간접적으로 사람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만약 뇌의 반만 있어서 기억은 조작할 수 있지만, 사리 분별은 사람처럼 한다면 사람일까 기계일까.
사람은 유인원 중 가장 효율적인 이족보행을 한다. 그렇다고 에너지 효율 1등급이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사람만이 가지는 특질을 열거하면 그것은 산술적인 특질의 합이지 본질이 아니다. 누군가 본질을 추론해 낼 수는 있겠으나 나는 모르겠다.
내 관심은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 본질이란 무엇일까에 있다. DNA는 각각의 생명체의, 또는 개개인의 질적인 차이를 드러내 주지만, 내가 알고 싶은 본질은 생명체의 물리적인 의미라든가 보편타당한 정의 같은 것이다. 나아가서 생명과 생명 없는 것의 본질적인 차이 같은 것, 그리고 동물과 식물, 사람과 기계, 나와 세계 같은 것이다.
사람의 사회적 의미를 관계에서 찾기도 하는 것처럼 본질의 비교로부터 본질의 실체를 알아낼 수도 있겠다. 사진에서 보면 꽃과 사람이 확연하게 구분되지만, 픽셀을 여러 번 확대하면 겹치는 부분이 꽃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본질을 비교하는 것도 비슷해서 이 본질과 저 본질은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서로를 정의할 수 없을 정도의 교집합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애매한 본질들로부터, 감각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른 질감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이러니이자 신비다.
본질로 접근하는 길은 마치 미시 세계로 들어가야 할 것만 같다.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다. 양파를 한 꺼풀씩 벗기더라도 양파만 나올 뿐이다. 이것도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리다. 양파의 본질은 한 꺼풀 벗겨진 양파에 있지 양파 안쪽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양파의 한 꺼풀에는 양파가 양파이기 위한 필요조건들이 가득하다. 그렇게 양파는 양파일 수 있고 당근도 당근일 수 있고 사람도 사람일 수 있지만, 식물이 식물인 이유, 동물이 동물인 이유는 눈에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지 그 출발부터 명확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그렇다. 원리는 가시적인 세계에 있지 않다. 신의 섭리가 있다면 어느 것도 쉽게 들춰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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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보팅남깁니다. 편안한 시간되세요:]

고맙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잘보고 갑니다!
행복한 한주 되세요 @sadmt

즐거운 한 주 되십시오.. 고맙습니다.

어려운 주제인것 같아요 ㅠㅠ.. 여러번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사실 어려울 게 없어야 하는데 제 한계입니다..ㅠㅠ

본질에 대한 문제는 언제나 너무 어려운것 같아요~
쉬러 들어왔는데 갑자기 머리가....ㅡ.ㅡ;;

그럴 때 필요한 건,, 레드 썬!!

동물과 식물, 사람과 기계, 나와 세계 ...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영화에서 보면 이럴 때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Take it easy~!"ㅎㅎ

참, 누끼를 딴다는 말을 처음 들어봤어요~^^

포토샵하는 사람들이 쓰는 말인데요,, 저는 그 많은 기능 중 누끼 따는 거 밖에는 할 줄 몰라요..ㅎㅎ
어렵게 생각할 거 없이 테키리지하는 게 아무래도 좋겠죠..ㅎㅎ

무슨 일이든 정답 찻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정답이 쉽다면 모두 서울대에...ㅎㅎ

흐리멍텅을 다르게 보면
신비로운 ㅋㅋ

카메라 픽셀 대신에
양자의 눈으로 ㅎ

넘 쉽게 정리해 주시는 거 아닙니꽈??ㅋ

경계가 없어지고 무엇도 아니면서 무엇도 될수 있는 ..유니콘님의 글을 읽다보니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네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찾아 봤어요..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경계가 뭉개지는 것도 같구요. 안에서부터 허물어지면 그리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프란시스 베이컨...ㅜㅜ

본질은 요리를 위해 양파에서 누끼를 따는 거죠? -ㅅ-

헉,, 한 줄에서 한 단어씩 찾아다가 붙였는데 말이 된다는....ㅋㅋ
양파 누끼는 제가 매일 따고 있습니다.

댓글이 다 재미있어요~
왜 글치?? ㅎㅎㅎ

그거는요,,, 서로 모르는 걸 주고 받기 때문이에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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