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in #kr2 years ago (edited)

예전에 어떤 장치를 상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헤드셋이나 안경처럼 귀에다 걸 수 있는 가볍고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는 장치인데요.

그 장치를 쓰고 사람을 보면 상대방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가 많은지 적은 지 어떤 인종인지 구별할 수 없으며 시각뿐만 아니라 사투리, 말투, 발음 등 목소리로도 성별, 나이, 지역을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후각도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만약 눈도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을 수 없지만 앞에 있는 사람에게서 중후한 여성용 화장품 냄새가 난다면 중년의 중산층 여성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좀 복잡한 건 넘어가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겉모습으로만 알 수 있는 모든 정보가 사라지고 그냥 한 ‘인간'으로만 보이게 되는 장치입니다. 이 장치를 쓰면 외모나 말투로 인한 모든 선입견이 없어지고 철저하게 말하는 내용으로만 소통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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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수업에서 학생들의 목소리만 들으면서 수업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실은 거의 대부분), 문득 이 ‘장치’가 생각났습니다.

'발랄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 학생들도 있고, '소심하고 어눌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하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발랄하고 힘 있는 목소리’에 더 끌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온라인 수업에 익숙해질수록 자연스럽게 목소리보다 내용에 더 집중하게 되었는데요. 아마도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집중해서 들으니 내용과 목소리는 별 관계가 없었습니다. 소심하고 어눌하게 말해도 얼마든지 내용이 좋을 수 있었습니다. 목소리 역시 편견과 선입견을 갖게 하는 주관적인 ‘감각 현상’ 임을 체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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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미 테드 창이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라는 단편에서 이 비슷한 '장치'에 대한 얘기를 썼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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