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23, 8월 종파사건이전의 연안파와 소련파 정리steemCreated with Sketch.

in #sct5 years ago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jpg

연안파 숙청

김일성은 한국전쟁 당시부터 중국과 관계가 가까운 인사들을 경계했다.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군지도자들과 전선사령관들을 비판했다.

김일, 최광, 림춘추같이 김일성의 심복과 함께 연안파의 무정, 김한중, 허성택, 박광희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서대숙, 현대북한의 지도자, 을유문화사, 2000, 81-82)

그러나 표적은 무정이었다. 그는 중국의 신임이 높았고 특히 펑더화이와 절친한 사이였다.

김일성은 제2군단장에서 철칙당한 무정이 명령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아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철칙한 이후에도 퇴각과정에서 법적수속없이 사람을 총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김일성 선집3, 현정세와 당면과업, 조선노동당 출판사, 1953, 167)

박일우도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북한과 중국이 연합사령부를 조직하면서 매개체 역할을 했던 박일우도 1953년 2월 연합사령부 부정치위원에서 퇴출되었다.

박일우의 퇴출은 정전협상과정에서 중국과 북한의 입장차이가 많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포로의 전원송환을 주장하면서 정전협정 체결을 미루고 있었으나 북한은 국내의 손실이 너무커서 조속하게 전쟁을 종료하고 싶었다. 북한은 중국의 입장을 대변하던 박일우의 입자강화를 두고볼 수 없었던 것이다.

1955년 4월 당중앙위원회는 박일우를 연합사령부에서 자신이 마치 중국의 대표자인 것처럼 행세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앗다.

전쟁영웅으로 알려진 방호산도 숙청되는 등 연안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제거되기 시작했다.

소련파 정리

연안파에 대한 정리가 전쟁중에서부터 시작되었다면 소련파에 대한 정리는 1956년에 들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56년 1월 상무위원회에서 박창옥, 박영빈, 기석복, 전동혁, 정률은 당의 문예정책 집행에서 범한 오류들이 실수가 아니라 부르주아 사상에서 나온 개인 영웅주의, 출세주의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비판받았다.

1955년부터 1956년동안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숙청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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