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 그 이면에 감춰진 것들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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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지구의 자전이 갑자기 멈추어 버린다면?'과 같은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곤 합니다. 그러한 상상을 하면서도 (아마 극심할 정도의 귀차니즘으로 인해)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지 찾아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오늘 웬일로 (게으름을 극복하고) 검색해 보니 '지구가 자전을 멈추면 시속 1600km의 강풍이 들이닥치게 되고, 화산폭발과 지진이 끊이지 않을 것이며, 결국은 지구가 달과 충돌해버릴 것이다'라는 끔찍한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구가 자전을 멈추는 일은 아마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크지만, 이와 같은 상상을 하면서 토막 과학상식을 익힐 수 있고, 또 이렇게 살아있음에 감사할 수도 있으니 공상이란 것이 꼭 불필요한 행동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에 익숙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갑자기 지구상에서 공기가(대기가) 사라져버린다면?'과 같은 재미있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의식하진 못하지만 얼마나 많은 것들에 익숙해진채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의 지평을 조금 넓혀 보면, '익숙함'이라는 단어는 '습관' 또는 '믿음'이라는 단어로도 대체 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수십년 간 큰 지진이 단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던 한반도에 살면서 지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익숙해졌고, 얼마전 그 믿음이 깨졌을 때 한반도 아래의 지각과 정부(?)에 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또, 우리가 매일매일 행하는 반복적인 행동이 충분히 익숙해지면 이는 '습관'으로 변화하고, 좋은 습관을 많이 만들면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고 합니다.

'오랜 연애에 서로에게 익숙해져 친구처럼 지내는 커플', '오랜 기간 근무한 덕에 이정도 일은 익숙하다'와 같은 표현에서도 느껴지듯, 익숙함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친숙하고 편안한, 긍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익숙하다는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익숙해져서는 안 될 것들이 있습니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근무지에서 제대로 된 작업장구를 갖추지 않는 일에 익숙해져버리게 되면, 안전 불감증으로 이어져 큰 사고를 유발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도로에서 운전대를 잡고 페달에 발을 올리고 있는 부동자세에 익숙해져버리게 되면, 졸음운전으로 이어져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계속해서 주장하는 일에 익숙해져 '쟤네 또 저러네? 이번에도 잠깐 저러다 말겠지'라고만 생각하고 넘어가게 되면, 국제사회가 결국 일본의 손을 들어주어 우리의 소중한 영해를 빼앗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명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할아버지•할머니께서는 슬하에 6남매를 두시어, 명절 때마다 할머니댁을 방문하면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그런데 모두가 맛있는 명절음식을 맛보며 웃고 떠드는 사이, 저희 어머니는 단 한시도 주방을 떠난 적이 없으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께 "엄마는 왜 항상 주방에만 있어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더랍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엄마는 우리 스텔라(본명 아님) 집에 살러 와서 그런거야"라고 대답하시곤 했죠.

우리는 그동안 명절이면 남자or본가쪽 사람들은 앉아서 음식을 맛보고, 술을 마시고, 여자들은 주방에서 전을 부치고 밥을 짓고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 나르는 모습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아마도 유교를 사회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의 풍습(이라 쓰고, 악습이라 읽는다)이 그대로 전해져온 거겠죠.

아직도 전설로만 전해지는 '명절에 전 부치는 남편' 이야기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요리를 '못해서' 그런게 아니죠. 단지 요리를 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아서 '안 하는' 겁니다.

익숙함이라는 단어 자체는 아주 좋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익숙함의 표면만 바라보고 이면을 보지 못하면 부조리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 현상이 발생하고, 이를 바꾸려는 시도조차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해 보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길거리를 청소해 주시는 분들이 일주일만 단체로 휴가를 떠난다면 부산의 중심가 서면의 길거리는 난장판이 되어버릴 겁니다. 짱짱맨 태그를 악용하는 외국인들을 정의의 가이드독의 이름으로 처단(?)하지 않으면, 한글로 된 양질의 콘텐츠를 그대로 복사+붙여넣기하는 사람들에게 과감한 다운보팅을 때리지 않으면 커뮤니티는 멍멍이판이 될 겁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풍경'의 이면에는 그 '당연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끔이라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이제는 당연해만 보이는 것들의 이면을 바라보려는 시도를 해보아야 합니다.

어제 오후에 올린 '흔한 명절 풍경'이란 글에서 음식을 만들고, 장을 보고, 설거지를 하는 극히 자연스러운 풍경 속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빠져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싶었지만, 글솜씨의 부족으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다시 읽어보니, 정말이지 허접하기 짝이 없는 글이네요. 참고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차피 삭제도 안되니 가끔 읽어보고 부끄러운 글솜씨를 돌아보는 데 써야겠습니다. (참 그리고 아버지 빼고는 우리 집안 남자들 모두 명절때도 집안일 정말 열심히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명절때 말고는 청소 열심히 하십니다. 그리고 요리는.. 자주 하는 우스갯소리로 '엄마가 3일만 집 비우면 아버지는 3일내내 라면만 먹다 병 걸리실 거다'라는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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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익숙함의 맹점을 잘 짚어 주셨네요. 우리는 익숙함이 주는 찰나의 편안함에 정말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사는 듯합니다. 익숙하게 여기던 것들에 불편함을 느끼는 일이 일어나야 비로소 문제점을 곱씹어보곤 하는 거죠.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런 불편함을 사람들이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도 예술이라는 장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틀린 일상, 비틀린 관념이 주는 불편함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구요.
이야기가 조금 샜습니다만, 글로 전하신 취지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성스런 댓글 감사합니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면도 예술의 존재가치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네요 ㅎㅎ

그동안 명절이면 남자or본가쪽 사람들은 앉아서 음식을 맛보고, 술을 마시고, 여자들은 주방에서 전을 부치고 밥을 짓고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 나르는 모습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아마도 유교를 사회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의 풍습(이라 쓰고, 악습이라 읽는다)이 그대로 전해져온 거겠죠.

시대는 정말 변했습니다. 낡은 악습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녀의 역할(?)이라고는 표현하면 잘못하는거 같고, 잘하는 부분이 분명 다르긴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다름이 이런 곳에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우월한 부분이 저는 분명 존재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건 ! 서로 입니다! 서로!
저희 어머니도 여자 이시고, 제가 앞으로 같이 함께할 사람도 여자 이기에 이런 악습은 정말 사라져야 한다고, 저부터 생각합니다....그래서..저희집 주방은..제것이 되어버렸...지금도 야식..차리고..설거지하고...이건 역차별입니다!!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명절내내 집안일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루돌프님 댓글 덕에 오늘 처음 웃어보네요 ㅋㅋㅋ

당연한 것은 없다 라고 생각하려는 노력이 필요한거 같습니다ㅎ
대체로 여자들의 받는 차별이 더 많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남자들도 역차별 받을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에 엄마와 대중교통을 타다가 든 생각인데,
대중교통에서 당연한듯 자리 양보해주시는 남자분들께 항상 고마워요.

'당연한 것은 없다' 정말 멋진 말씀이세요 경아님^^ 정성스런 댓글 감사드립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배려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해요 ㅎㅎ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것을 잃지말자~
하지만 익숙하기에 소중함을 깨닫기힘든법이죠.
한번씩은 제자리에 머물러 주변을 둘러보면서,
진정 소중한 사람들, 소중한것들을 생각해보는것도
좋을것같습니다~!

익숙하기에 소중함을 깨닫기 힘든 법이라는 말씀에 공감 또 공감합니다^^
설을 맞아 가족을 돌아보는 감수성(?)을 가져야겠네요. (아련..)

아.. 전 게으름이 익숙해져버렸는데... 새해에는 이 게으름과 멀어지길 다짐하는 이 것도 익숙해져버렸어요. ㅋㅋㅋㅋㅋㅋ 게으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항상 다짐하기 위해 게으름을 버릴 수 없었던.. 아.. 미쳤나봐요. ㅋㅋㅋ

살룬님.. 살룬님을 보며 '게으름'또한 예술가의 미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때로는 게으름으로부터 생겨나는 예술도 있는 법이죠 +_+

다운 보팅이라는 시스템은 좋게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만

고래가 악용하는 경우 무섭네요 ㅜ

여튼 좋은 컨텐츠를 복붙하는 행위는 용서하지 못할 행위인 것 같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컨텐츠를 복붙하는 사람들도 있나요 너무하네요!!
저희 시댁은 제사가 없고 시아버님도 전을 부치셔서 다행(?)이라죠ㅎㅎ 그리고 남편은 시댁에서 며느리인 제가 뭔가를 하면 무조건 같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ㅎㅎㅎㅎ 화장실 가는 거 빼구요~~

시아버지께서 전을 직접 부치신다니 축복받으셨군요! 결혼생활이 즐겁기만 할수야 없겠지만, 큰 스트레스거리를 하나 덜 수 있어 행복하실 것 같아요.

남편은 시댁에서 며느리인 제가 뭔가를 하면 무조건 같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ㅎㅎㅎㅎ

원래 부부는 뭐든 같이 해야하는 법이죠! +_+ 그 당연한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있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ㅎㅎㅎ 연휴가 얼마남지 않았네요. 낼부터 출근 가즈아..

그렇지 않았다면 전 이미 시댁에서 도망쳤을 겁니다~!!^^
맞아요- 전 누가 남편이 착하다 어쩐다하면 이게 보통이어야 한다고 합니다=ㅁ=!
세대가 바뀌어 갈 수록 발전(?)해야죠ㅎㅎ
여동생들과 남동생 모두에게 교육시키구 있습니당
일상으로 돌아가니 찌뿌둥... 파이팅이예요!!!

익숙한 것이지만 익숙하기 때문에 소홀해지기 너무 쉽지요. 너무 펀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라고 느끼고 막 대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저 역시도 읽으며 참 많이 반성하게 되는 글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부정적인 익숙함의 케이스는 '아줌마'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나고 자라며 티비에서 가게의 여사장님을 '아줌마~'라거나 '이모~'라고 부르면 친근함의 표시처럼 느껴졌었는데.
저는 비교적 최근에서야 그게 부당하는 걸 깨닫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조건 '사장님~'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스텔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음.. 그러네요. 혹시 '아줌마'라는 단어 자체에도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걸까요? 그.. '여자변호사' 이런 표현들도 비슷한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새해 다 지나고야 인사드리네요 케콘님 ㅠ 새해복 많이 받으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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