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임상심리전문가의 정신장애 이야기 #4] 조현병 : 정서 자각 및 조절에서의 어려움이 사회적 기능에 미치는 영향

in #kr-psychology7 years ago (edited)

조현병을 치료함에 있어 정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고에 비해 적었습니다. 조현병은 사고장애라는 도식을 강하게 지닌 치료자일수록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경험하는 정서에 포커스를 덜 맞추기 쉽죠. 하지만 조현병에 대한 최근 연구의 주요 흐름 중 하나가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경험하는 정서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함에 있어 그 사람의 정서 경험을 간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겠죠. 오늘은 조현병 환자가 어떤 식으로 정서를 경험하는지를 정서 자각과 정서 조절에 비추어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정서를 자각하는 능력과 조절하는 능력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능력입니다. 이 중 정서를 자각하는 것은 말 그대로 내 감정이 지금 어떤 것인지 식별하고 표현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시시대나 지금이나 불안이나 공포 등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을 인식하지 못 해 실제로 죽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생명을 잃는 상황까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서 자각 능력은 우리 일상 곳곳에서 중대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사회적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나침반 가운데 하나가 정서입니다. 비근한 예로,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는 것은, 즉 우리가 우리의 감정에 ‘화’라는 라벨을 붙여 화를 식별했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 대한 나의 기대와 상대방의 실제 행동 간의 큰 차이가 발생했음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분노는 우리가 이 차이를 인식하게 하고, 어떤 식으로 상대방에게 행동할 것인지 선택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따라서 정서를 자각하지 못 한다면 내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정서를 제외한 채 이성적으로만 판단을 했을 때 얼마나 불합리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뇌손상 환자의 사례를 통해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습니다. 정서를 자각하지 못 한다는 것은, 좀 더 쉽게 표현하면 피부를 통해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 하는 상태와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감각을 느끼지 못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듯이, 정서 자각의 어려움은 사회적 기능 수준의 저하와 상관을 보일 것입니다.

정서를 자각하는 능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정서를 조절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분노라는 정서를 자각했다 하더라도 분노를 부적절하게 표출하게 되면 그에 합당한 사회적 책임을 지게 돼 있습니다. 화가 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물건을 부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철컹철컹 쇠고랑을 차겠죠. 요즘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이고 있는데, 분노조절장애가 정식 진단명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분노 조절의 어려움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지를 상징하는 표현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분노를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표출하도록 돕는 것과 관련 있는 능력이 정서 조절 능력입니다. 이지영(2006)에 따르면 정서조절은 “개인이 불쾌한 정서를 감소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다양한 노력”입니다. 분노조절장애라는 표현은 분노를 감소시키는 데 완전히 실패하여 사회적인 역기능이 발생한 상황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정서 조절에 관해 학자마다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만, Gross 같은 학자에 따르면 정서 조절은 어떤 정서를 어느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고 표현할지와 관련된 일종의 전략입니다. 불쾌한 정서를 감소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다양한 노력을 이처럼 조금 더 세분화시키는 작업은, 우리가 동일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서로 다른 정서를 경험하고, 비슷한 정서 경험을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또 저마다의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각자가 사용하는 정서 조절 전략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상황에 처하거나 비슷한 정서 경험을 하더라도 저마다 다른 정서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죠.

Gross에 따르면 정서 조절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정서가 발생하기 전에 적용하는 선행사건 초점적 전략(antecedent-focused strategies)과 정서가 발생한 후 적용하는 반응 초점적 전략(response-focused strategies)입니다. 전자의 예로는 인지적 재해석이 있고 후자의 예로는 억제가 있습니다. 인지적 재해석은 상황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함으로써 부정적 정서의 발생 가능성을 낮추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그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겠다’고 역지사지함으로써 부정적 정서의 발생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죠. 억제는 말 그대로 이미 발생한 부정적 정서를 꾹 참고 누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나도 표현하지 않고 참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이런 정서 억제 전략을 많이 사용하다가 홧병이 종종 나곤 하셨죠. 예. 연구 결과를 살펴보더라도 반응 초점적 전략보다 선행사건 초점적 전략이 정신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정서 자각과 정서 조절에서의 어려움은 최근 조현병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려고 서두가 길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주로 신경인지(nuerocognition) 혹은 사회인지적(social cognition) 측면에 포커스를 맞춰왔다면 지금은 조현병 환자가 경험하는 정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죠.

조현병 환자가 경험하는 정서에 관한 연구 중 어떤 연구는 일반인 집단에서보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 집단에서 정서 자각의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어떤 연구에서는 일반인 집단에 비해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 집단에서 정서를 억제하는 경향이 더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연구에서는 인지적 재해석과 억제를 사용함에 있어 두 집단이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사실 과학적 연구라는 것이 이처럼 모인지 도인지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는 상황이 빈번하고 그래서 후속 연구자들이 모인지 도인지 계속 검증을 해보게 됩니다.

David Kimhy와 동료 연구자들(2012)은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이 일반인 집단보다 정서 자각 및 조절에서 어려움이 큰 지 검증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정서 자각 및 조절에서의 어려움이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의 사회적 기능 저하를 얼마나 설명하는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주요 연구 목적은 후자입니다. 기존 연구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성과를 더하고자 함이죠. 이들의 연구에서 사회적 기능은 가족 및 친구로부터 받는 지원 및 관계의 질에 관한 환자의 지각을 의미합니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 집단에는 조현병 환자 35명뿐만 아니라 조현정동장애 환자 3명, 조현양상장애 환자 3명, 달리 분류되지 않는 정신병적 장애 환자 3명 등 총 44명의 환자가 포함됐습니다. 일반인 통제 집단은 20명이었고, 이들은 모두 정신병의 과거력이 없고, A군 성격장애로 진단 받은 적이 없는 등의 기준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아래는 결과입니다.


Adapted from Kimhy et al. Psychiatry Res 2012;200:193-201.

결과를 살펴보면 일반인 집단에 비해 조현병 집단에서 정서 자각(정서 인식 및 표현) 및 조절의 어려움이 큰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일반인 집단에 비해 조현병 집단에서 정서를 인식(identifying)하고 표현(describing)하는 것의 어려움이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일반인 집단에 비해 조현병 집단에서 인지적 재해석을 덜 사용하고 억제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반응초점적 전략인 억제는 선행사건 초점적 전략인 인지적 재해석에 비해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쉬운 정서조절 전략입니다.


Modified from Kimhy et al. Psychiatry Res 2012;200:193-201.

조현병을 지닌 환자 집단에서 이처럼 정서 자각 및 조절에서의 어려움이 뚜렷하다면, 과연 조현병을 지닌 환자의 사회적 기능에 정서 자각 및 조절의 어려움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하겠죠. 그래서 통계적 기법 중 하나인 회귀분석을 연구자들이 실시하게 됩니다. 복잡한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씀 드리면, 정서 자각에서의 어려움이,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서를 표현하는 것에서의 어려움이 조현병 환자의 나이나 신경인지 기능 등을 통제하고 나서도 35%나 사회적 기능을 더 설명하였습니다. 나이나 신경인지 기능보다 정서 자각 능력이 조현병을 지닌 환자의 사회적 기능을 훨씬 더 많이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만큼 정서 자각 능력이 조현병 환자의 사회적 기능을 이해하는 주요한 통로라는 말이죠. 정서 조절 능력은 사회적 기능을 추가적으로 10% 더 설명했으나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Modified from Kimhy et al. Psychiatry Res 2012;200:193-201.

연구자들은 정서 인식 및 표현 능력 각각이 정서 억제와 유의미한 상관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즉 정서 조절 능력이 사회적 기능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정서 인식 및 표현 능력이 각각 정서 억제와 유의미한 상관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위 표에서 오른쪽에 박스 쳐놓은 부분입니다) 정서 인식 및 표현, 정서 억제, 사회적 기능 간의 인과관계를 찾아보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정서를 표현하는 것에서 평소 어려움이 있는 조현병 환자가 인지적 재해석을 사용할 시점을 놓친 채 이미 부정적 정서가 두드러지게 된 상황에서 반응초점적으로 정서를 억제할 가능성이 높고, 이로 인해 사회적인 지지를 받거나 의미 있는 관계를 맺어나감에 있어 더 많은 어려움에 처하기 쉬운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긍정적 정서만큼이나 부정적 정서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관계의 질 향상에 중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말입니다.

이런 연구를 하는 까닭은 치료적인 함의(clinical implication)을 도출하기 위함입니다. 연구를 위한 연구도 많지만 그러한 폐해를 잠시 생각지 않는다면,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연구는 근본적으로 치료와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연구에서도 치료적 함의가 나왔죠. 조현병 환자 집단이 일반인 집단보다 정서 표현의 어려움이 큰데, 그로 인해 사회적 지지나 관계의 질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면 치료적 개입은 조현병을 지닌 환자분이 정서적 표현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 방향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지적 기능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할뿐만 아니라 정서 표현을 잘할 수 있게 개입을 해야 한다는 치료적 함의를 갖게 되는 연구인 것이죠.

조현병을 지닌 환자분은 겉으로 보기에 둔감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특히 만성화된 경우라면 더 그렇죠. 이런 겉모습 때문에 정서에 대한 치료적 개입의 필요성이 적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모르긴 몰라도 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조현병에서의 정서는 관심의 대상이 되질 못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여지는 것이 다가 아니죠. 조현병을 지닌 환자분이 경험하는 정서의 물결은 거센 파도가 요동치는 바다와도 같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보게 됩니다. 슬픔, 기쁨, 두려움 등 여러 정서가 한데 엉킨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겉으로만 둔감해 보이는 것이지. 이제라도 조현병을 지닌 환자의 정서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와 치료적 개입에 관한 데이터가 축적되고 있는 것은 고무할 만한 사실인 것 같아요.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조현병을 지닌 환자분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전략을 가질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ref)

  1. 이지영, 권석만(2006). 정서조절과 정신병리의 관계. 한국심리학회지 : 상담 및 심리치료, 18(3), 461-493.
  2. David Kimhy, Julia Vakhrusheva, Lauren Jobson-Ahmed, Nicholas Tarrier, Dolores Malaspina, James J. Gross (2012). Emotion awareness and regulation in individuals with schizophrenia: Implications for social functioning, Psychiatry Research, 200, 19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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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지배하는 마음의 심연에 얼마나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지, 벽이 가로막아 깔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정말로, 우리는 3인칭 시점으로 관찰과 분석을 할 뿐, 1인칭 시점을 겪어보지를 못했기에 드러나는 부분을 통해 더듬어가며 짐작만 할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과정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은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희망을 가져봅니다. 조금씩 가까워지리라는 희망을요.

@홍보해

1인칭 시점으로 겪어보지 못 했기 때문에 장님이 코끼리 더듬는 기분이겠죠. 심리평가할 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이해하지 못 한다 하더라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감사합니다.

연구된 바탕으로 이런 병의 증상 및 진단에 대한 정보를 알려 스스로 혹은 가족에 의해 조기 발견이 될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조기의 치료를 시도해보거나 최소한 병의 패턴에 발생되는 개인의 문제라도 최소한이 되어 개인이나 가족의 삶이 좀 더 나아지면 좋겠군요. 물론 원인을 밝혀내 예방을 할수 있으면 더 좋고요. 잘 읽었습니다.

조현병의 평균적인 발병 연령이 남성의 경우 이십대 초반 정도입니다. 청소년기에 전구 증상이 나타나며 발병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경우도 많은데, 말씀하신 것처럼 조기 발견이 조현병에서도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병을 빨리 발견할수록 병으로 인한 기능 저하를 조금은 더 막을 수 있다는 게 정설인 것 같습니다. 많은 임상가들이 노력을 하고 있으니 멀지 않은 미래에는 조현병도 완치가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낙관을 가져 봅니다.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문성이 농후한 글이지만 알기 쉽게 표현해주시느라 애써주셔서 80퍼센트 정도 이해했습니다. 조현병 환자들이 정서조절능력이 일반인 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각종 위험한 행동들을 많이 하겠지요.

좋은 글 잘 읽었고 팔로우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스팀잇 여기저기 구경다니며 제 소개를 짧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할까'를 생각해보는 인성칼럼과
'터보힘준' 유머(인'터'넷에서 찾아'보'기 '힘'든 수'준'있는 유머)를
포스팅하고있습니다.
인터넷3대 구경거리는 미인, 동물, 유머라고 합니다.
제 창작 품위유머도 한 번 구경 오십시요 @isson99

위험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그럴 가능성이 일반인 보다 높다는 개념으로 수정했습니다.

@slowdive14님 안녕하세요. 입니다. @qrwerq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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