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임상심리전문가의 정신장애 이야기 #1] 신경인지장애: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에 관하여
기억을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지만 보통 크게는 절차적(암묵적) 기억과 서술적(명시적 혹은 외현적) 기억으로 나눕니다. 절차적 기억은 쉽게 말하면 자전거 타기나 자동차 운전처럼 우리 일상생활에서 최소한의 의식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들에 관계되죠. 서술적 기억은 특정 사실이나 개인의 삶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기억입니다. 주민등록 번호라든지 어릴 적 기억과 같은 것이죠.
보통 우리가 기억력 감퇴라고 말할 때는 서술적 기억의 감퇴를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께서 주민등록 번호를 잘 외우지 못 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기억력 감퇴를 넘어 소위 말하는 치매(정식 용어로는 신경인지장애)로 진단내리기 위해서는 기억력 감퇴로 인한 일상생활의 지장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게 현저한 수준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스불 끄는 것을 잊어버려서 빈번하게 음식을 태운다든지 현관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 자식들이 다시 가르쳐줘도 금방 잊어버린다든지 하는 문제들이 반복돼야 한다는 것이죠.
"기억력 감퇴는 기억력이 줄어드는게 아니라 뇌에 저장된 기억을 꺼내는 능력의 감소라고 보아야"한다는 @kimlee님(관련 글 보기)의 통찰에 감탄하게 됩니다. 현재까지 연구된 결과에 따르면 한 번 기억된 것은 뇌 어딘가에 저장돼 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저장은 돼 있으나 @kimlee님의 말처럼 저장된 기억을 꺼내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게 되고, 이에 '내가 지금 가스불을 켜놓은 상태다'라는 기억과 '현관 비밀번호' 같은 기억을 인출하는 것에서 어려움이 있게 되는 것이죠. 전문적인 용어로는 '인출실패'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출실패는 위에 언급한 두 사례처럼 서술적 기억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절차적 기억에서도 인출실패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늘 매던 넥타이 매는 법을 잊어버린다든지 늘 사용하던 컴퓨터의 기본적 조작에서 어려움이 발생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신경인지장애가 심해지면 눈 감고도 할 수 있던 일들이 어느 순간 되지 않거나 매우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양치질하는 법까지 잊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죠. 사실 양치질이라는 행위가 매우 자동화돼 있기 때문에 단순한 행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가 처음 양치질을 배울 때를 떠올려 보면(인출실패가 일어나는 분들이 많으실 것으로 예상됩니다 ㅎ) 이것이 얼마나 자잘한 단계로 이루어진 복잡한 행위인지 쉽게 알 수 있죠.
제가 신경인지장애 환자들을 만나보며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인출실패는 보통 서술적 기억에서 먼저 오고 신경인지장애가 진행될수록 절차적 기억에서도 발생하게 됩니다. (다만 전후관계가 분명하다기보다 많이 오버랩되죠 보통은..) 서술적 기억이나 절차적 기억 모두 인출실패의 단계라 할 만한 것이 있는데, 서술적 기억에서는 가스불 켜놓은 상태를 잊는 것처럼 immediate memory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손상이 오기 시작해서 지난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할 수 없는 recent memory의 손상이 이어지고, 이후 배우자의 이름이나 자식들 이름처럼 매우 중요한 사실조차 기억할 수 없게 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절차적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요리를 잘하던 분이 요리하는 것을 못 하게 되시는 것처럼 고도의 절차적 기억을 요하는 과제에서 수행의 어려움이 처음 나타나고 이후 양치질과 같은 기초적인 일상생활 관리의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신경인지기능의 퇴행적(degenerative) 과정이라고 합니다.
신경인지기능의 퇴행 과정에 따라 신경인지장애를 경도, 중도, 중증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장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mild cognitive impairment(병원에서는 줄여서 MCI라고 부릅니다)와 경도의 신경인지장애입니다. MCI와 경도 신경인지기능장애는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도 한 번에 판단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뇌 CT나 MRI를 찍어보기도 하고, 무엇보다 외래 면담을 통한 지속적 관찰과 몇 번에 걸친 신경인지 기능 평가 과정을 통해 병의 진행 추이를 살펴보고 최종 진단을 의사가 내리게 됩니다.
신경인지장애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우리가 치매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개 알츠하이머형 치매이고, 이 치매는 불가역적입니다. 한 번 발생하면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악화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진단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경인지장애의 경우 약물치료가 병행되지 않을 시 증상이 급격하게 악화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기억을 꺼내는 능력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완만한 형태로 감소한다고 할 때, 경도의 신경인지장애부터는 일상생활의 지장이 다른 사람의 눈에도 분명하게 관찰될 정도가 됩니다. 이 시점부터는 약물치료가 진행되지 않을 시 기억력의 급격한 감퇴뿐만 아니라 행동 및 심리적 증상Behavior Psychological Symtoms of Dementia(줄여서 BPSD)이 심화됩니다. BPSD에는 예를 들어 며느리가 내 물건을 훔쳐갔다고 주장하는 등의 피해망상을 비롯하여 환각, 우울 및 불안, 초초, 길을 잃어버리는 것, 충동적인 성적 행동(ex 속옷만 입고 길거리 배회), 식습관 변화(ex 폭식) 등이 포함됩니다.
신경인지장애를 지닌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들은 기억기능의 문제 그 자체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경인지장애를 지닌 환자들이 보이는 BPSD 때문에 괴로운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나 그 누군가가 BPSD를 보일 경우 보호자도 지칠 수밖에 없죠. 환자에 대한 분노를 느끼기도 하면서 다시 죄책감에 빠져들기도 하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신경인지장애를 지닌 환자들에 대한 국가적 캐어 노력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이뤄지고 있지만, 보호자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도 상당히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제가 생각하기에 기억과 감정입니다. 보통 한 사람의 정체성과 관련 있는 핵심기억에는 감정이 수반되게 마련입니다.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라는 뇌의 기관이 감정 조절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부위인 이유죠. 왜 누군가는 단순 기억 감퇴에서 그치고 누군가는 신경인지장애로까지 발전하느냐에 대한 명확한 답을 현대 과학은 아직 찾아내지 못 했습니다.
신경인지장애로 인해 한 인간의 기억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빈번하게 보면서, 슬픈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하고 지지적인 부모였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평생 지지고 볶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소중한 내 남편이나 아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최소한 알츠하이머형 치매는 치료를 통해 완치될 수 있는 병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 병도 완치가 가능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유지한 채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알던 사람이 더이상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게 될 때, 매우 절망적일 것이라 짐작합니다. 가역적인 반응이라면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겠지만, 비가역적이라면 특히나 더 그럴 것 같습니다.
뇌라는 것이 참 복잡미묘한 기관이다보니, 이를 다루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기능을 평가하고 이에 따라 약물이나 상담을 사용을 사용하긴 하지만, 다른 부위처럼 외과적 절제 혹은 개입(intervention) 같은게 어려우니까요. 물론 SSRI 같이 나름대로 특이적인 약물들은 존재하긴 합니다만...그래도 ADNI, Alzheimer's Disease Neuroimaging Initiative 같은 재단들이 있어서 앞으로는 좀 더 나아지리라,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홍보해
리스팀 대단히 감사합니다. 블로그에 글들 흥미롭게 읽었어요.
옛글을 읽으셨군요. 부끄럽습니다...
흥미로운 글이었습니다 ㅎ
양치질을 습득한 기억을 추출해내려다가 그만 실패를 해버렸네요.
보통은 그렇게 되는 거 아닐지요
반갑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