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보 염상섭의 사랑

in #kr7 years ago

횡보 염상섭의 사랑
1964년 3월 14일 염상섭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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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 일본 오사까 덴노지 공원. 한 청년이 비장한 목소리로 뭔가를 읽어 내린다. 독립선언서. 그런데 그건 ‘오등은 자에 아’로 시작하는 기미독립선언서가 아니었어. 그 독립선언서의 저자는 읽고 있는 젊은이 자신이었어. 선언하는 주체는 재대판한국노동자일동(在大版韓國勞動者一同)이었고 그 옆에 주동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 대표 염상섭.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유명한 소설가 염상섭의 젊은 날이었지. 초등학교 때 이토 히로부미가 방문하자 환영 인파에 동원되는 것이 싫어 수업을 제끼고 전문학교도 손병희가 주인으로 있던 보성학교에 입학할 만큼 반일의식이 투철했던 사람이었다네.

그런데 꽤 또랑또랑해 보였는지 심지어 일본인 판사도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하고 2심 3심 무죄로 석방되는데 기실 이후의 그는 그렇게 남에게 호감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어. 오히려 깐깐하고 뒤끝있는 청년 문학도였지. 자연주의, 사실주의 소설가로 불리는 그를 두고 최인이 내린 인물평은 재미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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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잣집 맏며느리 같이 풍부하고 유순해 보이기는 하면서도 입하나 꽤 뾰죽한 모양이어서 어지간히 신랄한 풍자를 하시는 모양인데 나는 그의 샐죽한 풍자에 더러 찔려본 줄로 기억한다. 원래 소설이란 잔소리 말이요, 잔소리는 굵은 입보다는 뾰죽한 입으로 나오기가 편할 것이다.......원컨대 술을 좀 줄이셨으면 한다. 그대는 우리 민족의 보물의 하나이다. ” 결론적으로 극찬 같긴 하지만 우리는 이 인물평 속에서 염상법의 숨은 얼굴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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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군수를 지낸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구김살없이 자라난 그이지만 노동자들 모아놓고 독립선언서를 읽을 정도로 ‘뾰죽’하기도 했지. 그의 논리적이고 신랄한 문체를 알아본 동아일보 정경부장 진학문에 의해 발탁돼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도 했고. ‘잔소리’는 그런 입에서 나오기 쉽다는 최인의 말대로 그는 서울 토박이 다운 ‘경아리 말투’의 보고였다고 하네. 소설가 김원우에 따르면 거의 '수집가스러운 강박‘으로 우리 말을 끌어 모아 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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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줄이라는 말대로, 염상섭은 여자들을 한 트럭씩은 휘몰고 다녔던 당시 작가들과는 달리 여자보다는 술을 사랑한 사람이었지. 옆으로 걷는다는 뜻의 ‘橫步’(횡보)는 일종의 음주 후 게 걸음을 걷는다는 뜻이었다니 말 다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 대포 100잔 정도는 거뜬히 비웠다니 속에 구멍이 나도 단단히 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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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없으면 글 한 줄 못쓴다고 했고 술 취해서도 원고지 꺼내 끄적이기도 했는데 그게 그렇게 명문이었다는 이 주태백 닮은 작가는 이사를 갈 때마다 외상 술집을 개발하는 데 대가의 실력을 보여 주었지. 새벽에 해장하다가 심심하다고 파출소 순경들 불러들여 술 따라 준 쯤 되면 일정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괜찮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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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주당이 얼마간 술을 입에 안 댄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건 임신 중인 아내가 술을 끊지 않으면 친정에 돌아가겠다고 선언했을 때라지. 물론 그 애가 돌이 된 다음에는 다시 고주망태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이 주당을 얼마간이라도 술을 끊게 한 것이 아내였듯, 염상섭은 아내를 매우 사랑(집착?)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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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내가 된 김영옥은 숙명여학교를 졸업했는데 농구 선수 출신의 활발한 여성이었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소설 횡보 염상섭을 보면 별 생각 없이 맞선 자리에 나간 염상섭의 작품을 또박또박 씹어내는 매력에 반해 결혼에 골인한 걸로 돼 있지. 서른 셋 노총각이 열 아홉 살 처녀의 신랑이 된 거지. 뭐 별 것도 아니야. 내 친구 한 놈은 나이 마흔 여섯에 스물 둘한테 장가를 들기도 하는 특수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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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동인이 <발가락이 닮았다>는 소설을 쓴 적이 있지. 문란한 생활 끝에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남자가 안고 온 아기. 그 내막을 아는 의사와의 대화에서 남자는 자기 애에게 ‘발가락이 닮았다’고 하는 이야기. 이 모델이 염상섭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염상섭의 애도 염상섭이 아니라는 루머가 퍼져 염상섭은 그 후 15년간이나 김동인과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 화해하는 방식도 웃겼지. 어정쩡하게 마주해서 한 명이 껄껄 웃기 시작하자 같이 껄껄 웃어대는 걸로 화해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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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간에 서로 믿는다는 것은 결국 사랑한다는 말이지만, 사랑한다는 것도 극단에가서는 남이 나를 사랑하거나 말거나 저 혼자의 일이다. 저 사람이 받지 않더라도 자기가 사랑하고 싶으면, 자기가 만족할 데까지 사랑할 것이다. 외기러기 짝사랑이라고 흉을 본다기로 그거야 알 바 아니거든, 그와 반대로 사랑치 않는 것도 자유다. 사람에게는 사랑할 자유도 있거니와 사랑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부부간이라고 반드시 사랑하여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을까. 없는 사랑을 의무적으로 짜낼 수야 있나?" 라는 그의 소설 <만세전> 캐릭터와는 달리 그는 무척이나 아내에게 집착했어. 글을 쓸 때 아내가 없으면 불안해했고 의처증이라는 말까지 들었지. 아내도 결혼 후 10년이 넘도록 남편에게 맨발을 보이지 않았을 만큼 남편을 존경했다지. 옹고집 소리 듣는 횡보도 아내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들었다니 연분은 연분이었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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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은 1964년 3월 14일 직장암으로 타계할 때에도 당시 쉰 셋이던 부인이 자기를 버리고 재가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버리지 않았다고 해. 아니 자기 죽은 다음에 자기가 뭘 어쩔 거라고..... 그 양반도 참. 어쨌든 조사에서 문인 방인근이 부인이 개가할 걱정은 하지 말고 가라고 썼을 정도라니 그야말로 말 다했지 뭐야. 죽어가면서 아내에게 내 빈 꽃병에 흰 국화 한 송이 놓아 달라고 했다는데 어떤 이는 여기서 ‘민족의 순결성’을 읽기도 하지만 글쎄 그는 서른 셋의 까칠하고 뾰족한 노총각 앞에 별안간 떡 하고 나타난 숙명여학교의 열 아홉 졸업생을 떠올린 것이 아니었을까.

평생 글과 술만 사랑하고 살았다는 염상섭이 아내를 세상에 두고 가는 걸 못내 아쉬워하며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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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글쟁이들이란 술독을 끼고 사는지
멀쩡하게 산 사람보다
술병으로 단명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랬군요. 재미나게 읽었어요. 작가에게 그런 일화가 있다니...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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