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은 기억 소환기

in #bus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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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잇은 기억 소환기]

한때 내 일부였던 것들, 현재는 그것의 연장선이지만 그것은 마치 오래된 친구의 기억처럼 타자화되어 있다.

잊고 살던 게 많았다.
기억이란 베란다 옷장에 쌓여 있는 다 헤진 옷이다. 그중에는 재활용 분리수거함에 들어간 옷들도 적지 않다. 그런 버려진 옷들은 소환술을 펼치기에 너무 늦었다.

내 모든 의식의 흐름은 현실을 소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출근해서 일하고, 성장하는 아이들을 대견하게 바라보고, 영화도 보고, 바둑TV에서 중국팀에게 지는 한국팀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보는 것들이 나에게 주어진 생활이었다. 그런 생활이라고 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다만 무거워 보이는 텅 빈 여행 가방을 무심코 힘껏 들어 올리는 경험처럼 가벼운 공허함이 가끔 찾아든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소신의 옷장에는 아직 12벌의 옷이 남아있사옵니다.

스팀잇은 기억 소환기이다.

다른 분들의 밀도 있는 글들을 읽다 보면 옛일들이 하나둘 스친다. 비슷한 경험으로 기억 일부를 건드리거나, 때로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뇌세포를 재조립하여 다른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캔맥주를 먹다가 느닷없이 오로라가 떠오르는 기분적 기분 같은 거. 포스팅을 위해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내 기억회로는 특히 팽팽 돌아간다. 내가 언제 이렇게 쓰고자 애쓴 적 있었나?

최소한 한 번은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다. 신문사 공모전에 시를 응모했던 적이 있었다. 결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화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그 당시 시집을 내고 싶었으나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를 스캔하다 보니 무엇이든 써보고 싶었던 때가 그때만은 아니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조개껍데기를 찾던 아이가 우연히 소담스러운 소라 껍데기를 주웠다. 아이는 열심히 찾았고 곧이어 소라 껍데기 무더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이 이와 비슷한 듯하다. 기억의 옷장을 뒤적거리다 보면 한 가지 키워드에 몰려들어 있는 기억의 단편들을 찾을 수 있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쯤 백일장이었다. 원고지가 없었던 나는 반 친구 두 명에게 동시를 한 편씩 써 주었다. 그중 한 편이 당선되었고 그 친구는 상을 받았다. 내가 그 친구를 고깝게 생각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내 출세작이었다. 6학년 때 전학 간 학교에서는 내가 쓴 동시가 액자에 담겨 교실에 걸리는 영광을 맛보았다. 그때 쓴 동시의 제목은 "잘 어울려요"였다.
스물아홉, 작은 자취방이 내 유일한 안식처였던 시절, 곧 다가올 서른이 인생의 끝인 줄 알았다. 그때 나는 퇴근해서 미친 듯이 시를 썼다. 단어나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머리카락을 부여잡기도 하고 맞은편 벽을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보기도 했다. 진작 버렸어야 했는데, 그때 쓰던 습작 노트를 여지껏 가지고 있다. 건전한 정신으로 생존하려면 이런 낯 간지러운 것들은 버려야 한다.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는, 20대 중반쯤 썼던 습작 노트들도 기억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사단 민심처에서 근무하던 군 시절, 약간 얼빵한 정훈장교(나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렸다) 때문에 그의 일을 도맡아서 했다. 매주 한 번 장병들에게 배포하는 사단 신문의 칼럼을 쓰는 일이었다. 국방일보에 투고했던 글이 덜컥 실리는 바람에 2박 3일 휴가를 받은 적도 있다. 평소 내 생각과는 완전 다른 글들이었지만 편한 군 생활을 위해 기꺼이 임시 전향했었다.
고3 수학여행 중 3행시 대회에서 상을 탄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나의 커리어이다.

소환술을 부려 불러낸 이 기억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치기 어리거나 아이들 장난 같던 이 기억들이 왜 지금에야 하나씩 생각나는 걸까. 이유야 어떻든 스팀잇은 이런 행복했던 기억들을 건져내 주었다. 더불어 나에게도 한때, 내 마음 하나 정도는 달굴 수 있는 뜨거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였다. 포스팅의 압박이 점점 달콤해지고 생각의 실타래를 푸는 것이 즐거워지는 이유가 이것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적은 양이지만 꾸준히 적립되고 있는 스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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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스캔하다 보니 무엇이든 써보고 싶었던 때가 그때만은 아니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중에서 윗 구절이 상당히 인상깊어 이렇게 발췌해보았네요.

과거를 스캔하다 보면 무엇이든 써보고 싶었던 때가 그때만은 아니었다...

직접 타이핑으로 다시한번 쳐봤네요. 너무 공감됩니다.

저도 제 이야기를, 혹은 제 창작물을 온전히 나만의 창작물을 쓰고 싶은 때가 있었는데

그 때 든 기분이 딱 저 기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장소가 마련되었으니, 앞으로도 좋은 글들 많이 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공감까지 해 주시니 넘 고맙습니다.
초이님은 이른 나이에 뉴질랜드에 정착하셨네요...ㅎㅎ
머나 먼 고향을 향수하시면 멋진 창작물이 탄생하겠는데요..^^
앞으로 차츰 실망하실지 모르겠지만^^;;,, 되는데까지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정착은 아니고 운이 좋아서 일하면서 삶의 전반기 정리를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ㅎㅎ

언제든 계기나 동기가 있다면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젊은 분들이 외국에 쉽게 가시고 하는 게 저는 진심 부럽습니다..ㅎㅎ
열심히 사시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열심히 산다고 봐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스달은 스티미언을 춤추게 한다...ㅎㅎ
소환된 기억의 조각들 잘 엿보고 갑니다.

사람 욕심이란게....참...
스팀 많이 올랐는데 좀 더 가주면 좋겠네요...ㅎㅎ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짠지...
그 많은 시어들의 출구가 화려 했군요..
예상은 했습니다 ㅎㅎㅎ

이제 한 두해만 지나면 이렇게 하고자 했던
글에서 주렁 주렁 달리는 결실이 있을겁니다 ^^*

이전에는 까맣게 잊고 있던 일들인데요.. 스팀잇이 다시 일깨워주네요.
얼추 이 글도 낯이 좀 간질간질한데 좋게 봐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ㅎ

좋은 발견이네요.

사람들마다 자라던 시절
이런저런 기억을 되살려
되새김질하니 같이 음미하게 됩니다.

저도 이 글 보면서
학창 시절 글쓰기가 막 떠오르네요.

스달과 기억 괜찮은 주제라
다음에 한번 써보고 싶네요 ㅎ

광화님이 쓰시면 깊이가 남다를거에요..ㅎㅎ
이러다 추억 파먹는 애벌레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먹을 만큼 먹고 나면 나비되어 팔랑팔랑 ㅋ

이제 기운이 없어서 나비가 되어도 날지못..... ㅋㅋ
걸어다니는 나비 조만간 보실지도...

그 기억들이 유니콘님을 이끌어주는 원동력이 아닐까요?!
어쩐지 단어들이 문체가 시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습작노트 속 시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궁금해요^-^

저도 잘 안봅니다.. 그 습작노트 들춰보는 날이 그 노트에게는 제삿날이 될겁니다.ㅎㅎ
아 창피 ㅋㅋ

새드님 글을 읽으면 항상 한편의 시 같네요...
역시 필력이 괜히 좋으신게 아니었어...
그 습작노트 정말 읽어 보고 싶네요. 반짝 거릴 것 같습니다.

안돼요.. 보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눈이 멀 수도 있어요..ㅋ
진심 필력이 좋다는 생각은 안해봤는데요.. 그렇게 봐주시니 넘 고맙습니다.ㅎㅎ

문득 시스터액트2에 나왔던 우피 골드버그의 명대사가 떠오르네요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노래를 부르고 싶다면, 너도 가수가 될 수 있어."

역시 바로님 비유는 수준급입니다..
늦었지만 그래도 스팀잇이 있으니...

저도 스팀잇 덕분에 기억을 소환 중입니다. 잊혀진줄 알았는데, 다른 스티미언의 글을 읽다보면 그 기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납니다.

스달이 쌓이는 것은 돋아난 기억으로 맥주라도 사먹으렴 이런 소리인가 봅니다.

스달로 맥주를.... 이제 스맥의 시대인가요 ㅎㅎ

그러구러하게 산 거 같은데 돌아보니 나름 추억할 게 많네요.. 내가 지금 이런 생각하고 있을 줄을 그때의 내가 예상이나 하고 있었을까요..
시간의 마법이네요..

역시... 보통필력이 아니시구나 하였는데;
예전부터 내공을 꾸준히 닦아오고 계셨군요! ^^

너무 오랫동안 잊어먹고 있었어요..
보잘것 없는 소고를 과분하게 생각해주시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보는 분들에 따라서도 글의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거 같기도 하구요..ㅎㅎ
원장님 바둑 역사 칼럼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ㅎㅎ

시쓰는 공대생이라...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군요. 단 한번도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거라 생각한 적 없는데 글을 쓰게 하는 스티밋은 저에게 까페이고 클럽같은 곳이지요. 불금하세요^^

북키퍼님은 책을 많이 읽으시니까 써야 할 때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저는 한동안 책을 너무 안봐서 좀 후회스럽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못봅니다.. 스팀잇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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