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출제자의 의도

in #kr8 years ago (edited)


오늘도 일기를 쓰고 싶은 것을 보니, 일이 많이 밀리긴 한 모양이다. 한가로울 때는 딴 짓에 대한 욕구가 별로 없다가, 바쁠 때는 딴 짓에 대한 욕구가 무럭무럭 자란다. 특히나 무언가 흡수를 열심히 해야할 상황에는, 무언가를 방출하고 싶은 욕구 또한 커지곤 한다.


한 때, 법학적성시험의 비문학 지문에 관하여,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회사의 LEET 모의고사 출제 알바를 한 적이 있다. 이리 적으니 좀 거창한데, 다른게 아니라 문제 은행을 구성하기 위해 다양한 출처를 바탕으로, 보기와 지문을 구성하고 문제를 만들면, 이에 대해 작성된 문항 당 수입을 얻는 방식이다. 그런데 작성된 문항을 모두 구입해가는 것은 아니라서, 형편없이 만들면 당연히 안사가고 (reject), 그래도 조금 수정(revision)해서 쓸만하다 싶으면 구입해가거나 수정 의뢰가 들어오곤 했다. 예를 들어, 지문에 주어지지 않은 정보나 정보를 통해 유추하기 어려운 문항을 구성한다거나, 수험생이 문제를 풀기에 (답이 딱 떨어지지 않는다든가 해서) 오류가 많다면 역시 그러한 문제는 형편 없는 문제에 속하므로 아웃이다. (물론, 출제 알바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서, 비슷한 지문과 유형이 이미 문제 은행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에도 회사에서는 구입하지 않는다.) 모의고사에 포함된 문항에 대해서는, 회사에서 모의고사 시험지를 보내주곤하니, 분명히 로스쿨 수험생들 중에서는 내가 만든 문항을 몇 개는 풀어보았으리라 짐작한다.

이러한 출제 알바를 하기 위해선, 우선 회사 측의 테스트를 거쳐야하는데, 샘플 문항을 만들고 보내어 평가를 받는 방식이다. 당연히 처음 인상이 중요하므로, 나름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샘플 문항들이 항상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나처럼 상상력과 비약을 통해 글을 작성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제대로 공부한 수험생이 길을 잃지 않도록(?), 출제자의 의도를 명확하게 지문과 문항에 배치하는 것이 생각보다 곤혹스러운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삶과 시선의 다채로움을 어딘가에 욱여넣고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심지어 이러한 출제자의 의도는 너무 빤해서도 안되고, 너무 어려워서도 안되는 - 적절한 수준으로 조절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따라서 수험생들이 어디까지 사고할 수 있을 것인가를 미리 예측해서, 군데군데 도랑을 파놓는 작업을 하는 느낌이었는데, 이는 하나의 글이 어떻게 다양한 방향으로 읽힐 것인지를 고민하기보다는 깊고 얕게 읽힐 것인지를 고려해야했기 때문이다.

시(詩)라는 장르는, 신기하게도 이러한 출제자의 의도를 고려한 독법과 상당히 대척점에 있는 독법을 요구하기 때문에, 나에게 재미있는지도 모르겠다.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서만 글이 읽혀야 한다면, 그 것은 아주 효율적이고 명징한 메시지(정보)를 전달하는 글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런 속성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서, 상상력과 여백이 종종 풍성함을 선사하는 것을 보곤 한다. 예를들어 우리는 잉여에 대해 자조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곤 하지만, 사실 잉여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출제자들을 마주치게 되는데, 어떠한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놓고 풀어보라는 식인 경우가 많다. 그러한 문제들은 정말로 우리가 풀어야하는 경우도 있지만, 굳이 풀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상당하다. 심지어 풀어야하는 경우라도, 세심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러니 이 지점에서 우리는 두가지의 선택을 하게 된다. 하나는 출제자의 의도를 짐작하여 더 정교하게 설계를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제자의 의도는 모르겠으니 우리 나름대로의 풀이 방식을 갖는 것이다. 나는 균형의 관점에서 이러한 두 가지 방향의 선택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후자의 선택은 종종 무시당하는 경우를 목도해왔다. 출제자의 입장에서, 누군가 출제자의 의도는 사뿐히 날려버리고 새롭고 참신하며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할 때가 사실 가장 통쾌하다. (물론 인생이 객관식이 아님을 가정하자.) 그러니 가끔은 딴소리를 해도 좋다. 문제를 비틀어버릴 만큼의 딴소리는 그 문제를 풀어야할 것에서 그 문제를 바꿔야할 것으로 만들어버리곤 하니까 말이다.

이는 나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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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출제자의 의도를 짐작하여 더 정교하게 설계를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제자의 의도는 모르겠으니 우리 나름대로의 풀이 방식을 갖는 것이다.

직업 상 타인이 풀어내야할 문제를 출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저의 경우 수학이라는 업을 지고 있는 입장에서 전자의 답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죠. 근데 지금에 와선 후자도 무시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쩌면 후자가 더 나을 수 있으리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열린 질문으로의 문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글 쓰기에서 균형이라는 말을 들으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잡문집에서 소설을 쓰다가 균형을 잡기위해 해외작품(보통은 미국 소설이더군요.)을 번역한다고 하더라고요. 제대로 비슷한 경우인지는 모르겠으니 문득 전에 읽은 그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뭐든 치우치면 위험할듯도 싶습니다.

수학이 내재하고 있는 철학이 애초에 명확한 답을 요구하는 것이겠지만, 우리에게는 풀이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풀이의 방식과정이라는 다른 평가의 축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문제를 푸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게 된다면, 결국 문제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어떠한 문제를 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어렵게 된다고 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열린 질문은 사실 풀이자에게 다시 질문을 만들게 하는 작업이며, 풀이 방식 또한 이를 통해 나름의 풀이방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균형이, 실제적 감각으로서의 균형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결국 어떠한 연습과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의 의식으로서 말이지요.

잘. 보고 갑니다
몰랐던 분야가 있네요 ^^

흔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시험이나 문제들을 살펴보면 사실 다양한 출제자들의 성향을 살펴볼 수도 있답니다.

오호 정말 좋는 글이네요 어느 분야든 문제의 답을 하는법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느 분야든 명시적이거나 모호하거나 어떤 방향으로든 출제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출제자가 항상 사람일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니 이 글은 좀 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대부분 내 삶의 출제자는 나 자신이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사실은 나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래서 틀린 답으로
(내 자신에게는) 살아온 까닭에 행복찾아내기에 여간 힘이 들었던 게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찾아내야 하는 게 행복이니까요

지금은 다행히 내 삶의 초점이 내게 있는 것 같아요 아니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요

친한 친구 녀석이
영국에서 있다가
몇 해전 영어교육평가원에서있는데
시험출제기간엔 꽤 오랫동안
핸드폰도 반납하고 합숙하더군요

오롯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는 과정만을 삶에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든 타인이 낸 문제들을 일정 부분 풀어야 하고, 그래야 사회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다른 답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닌데, 틀리다고 낙인이 찍히는 순간 사실 좀 힘이 듭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초점이 자신에게 있다는 느낌이 드셔서 다행입니다. 행복의 감각이 항상 삶에 닿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점수와 평가에 반영되는 - 공식적인) 시험 출제는 확실히 좀 더 엄격한 측면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러한 문제들이 사람의 삶을 결정하곤 하니까요.

시험 출제 알바!! 전문직입니다.. ㅎㅎ!!

전문적이 되어야 하긴 합니다. 제대로 출제를 안하면 (잘 안팔리게 되면), 결국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수입도 없는지라 (...)

이제 제 인생에 남겨진 3가지 문제만 풀면됩니다...ㅎㅎ 어차피 주관식이니까 한 문장씩 만들어 가고 있어요...

주관식의 자유로움을 사랑합니다. 힘있는 문장들이 만들어지길 바라봅니다.
3가지 문제를 푸신다면, 아마 또다른 3가지 문제들이 나올지도 모르니, 그 경우에도 힘있게 내딛으시면 되겠습니다. :)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출제자들을 마주치게 되는데, 어떠한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놓고 풀어보라는 식인 경우가 많다. 그러한 문제들은 정말로 우리가 풀어야하는 경우도 있지만, 굳이 풀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상당하다.

굳이 풀어야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푸는 우리는.... 왜 풀었을까요? ㅠㅠ 단순히 출제자가 나보다 권력관계에서(=친구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잡은 사람이 있듯이) 위에 있기 때문에? 아니면 도전의식 때문에?

저는 어떤 문제든지 주어지면 풀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qrwerq 님이 말씀하시니 '아..!' 하는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가끔씩 저는 당당히 출제자의 의도는 가볍게 무시하고 마이웨이 해석을 제시해왔네요..? ㅎㅎ

삶을 문제 풀이의 연속과 같은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도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풀고나면 얻게되는 보상들도 문제를 풀게 만들기 위한 - 무시할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이나 도전은 그러한 요소 (보상에는 풀었을 때 생기는 양의 보상과 풀지 않았을 때 생기는 음의 보상 - 이른바 넒은 의미의 처벌 - 이 있을 수 있습니다.) 를 반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더 비틀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문제를 풀었다는 결과가 다시 새로운 문제를 생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를 풀기 전에 한번쯤 이 문제를 풀고나면 어떠한 문제를 추가로 풀게 될 것인가에 대한 연쇄를 살펴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이웨이 해석을 좋아합니다. 출제자의 입장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해석이,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이기도 하고요.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직업이??

직업이 계속해서 바뀌고 있어서, 뭐라 특정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직업적 노마드(nomad) 같은 느낌이랄까요- 지금은 기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 출제자 분을 뵙기는 처음입니다 ^^

출제자분들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지요.
오늘도 멋진 하루 되세요.

오늘 하루도 힘찬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꿰뚫어 만족시키는 것도 좋고, 아예 문제를 비틀어 버리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두 방향 모두, 어떠한 방식으로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일거라 믿습니다. :)

바쁘지 않을 때는 하고싶지 않던 일이 바쁠 때는 지독히 하고싶을 때가 있다는 말에 완전공감하며...

출제자의 의도를 짐작하여 더 정교하게 설계를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제자의 의도는 모르겠으니 우리 나름대로의 풀이 방식을 갖는 것이다. 나는 균형의 관점에서 이러한 두 가지 방향의 선택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후자의 선택은 종종 무시당하는 경우를 목도해왔다

저역시 qrwerq님의 의견에 적극적 동의를 합니다. 이제 초딩 1학년인 우리 아들 첫 시험 공부를 같이 하는데 그런 경우가 많았어요. 여기서는 viber릉 카톡 단톡방처럼 쓰는데, 거기다가 이제까지 있었던 퀴즈 문제와 답을 재차 올려서 이의를 제기하고 두 문제의 답을 복수로 결정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어요(ㅋㅜ) 한국엄마 피곤하다 했겠다고들 옆에서 말하지만, 또 이곳이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경우라 그런 것에는 또 쿨하거든요.
우리 사는 곳 어디든, 개인의 생각과 그 가치에 조금 더 집중하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러한 농땡이(?)가 어쩌면 우리네 마음에 균형(?)을 찾아가고자 하는 몸부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문제든 그 것을 결정하는 해답보다, 그 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중시하는 교육적 관점에서 출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주관식과 객관식의 차이 일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의도를 찾게 되는 문제 풀이가 되면, 점수가 효율적으로 상승할 수 있고 그게 어느정도는 삶의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스스로 어떠한 문제를 정의하고 직접 풀어야하는 상황이 오면 (다시 말해 자신 스스로가 출제자가 되는 상황이 오면) 어려움에 빠지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생각과 가치는 결국 스스로에게 문제를 내고 스스로 푸는 출제자이자 문제를 푸는자로서, 아주 중요한 삶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가치에 항상/오롯이 집중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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