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연재] 겜블라이프 #9

in #kr6 years ago

나의 노력으로 우리는 몇번의 가족 모임을 가졌고

연락은 조심스지만 자연스럽게 하는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어 붙인 가족들의 그 다리는 그 이상 큰 진전이 없었다.

왕래가 없는 풀숲에는 잡초가 무성해지는 법이듯

이대로 고착화되면 내 노력이 수포로 돌아 갈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 나는 초강수를 뒀다. 어머니와 누나가 보는 앞에서 난

별 같잖은 이유로 씹어 먹던 사과를 집어던져 유리를 박살 내 버리고

집 가구를 일부러 모두 바닥에 밀어 무너 뜨리고 부셔버렸다.

집 안에서 유일 한 남자이고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는 하나

나라는 그릇에 은근히 심적으로 기대고 있던 어머니와 누나를

내 대신에 다른 그릇을 찾아 나서게 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지금은 나는 내 목적을 위해서 오직 나의 욕망을 위해서

했던 행동들은 깊게 뉘우치고 반성한다. 하지만 내가 옳았고 나는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지금 와서는 후회가 남지 않았다.

당시에 그 누구도 나에게 성공하라 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나에게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기만을 요구했다.

나를 사랑했던 여자들 역시 그때의 부족했던 볼품 었던 나를 그 순간

그 자체의 사랑했는데 난 착각을하고 항상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며 몰아댔다.

그리고 그변명으로 말하기를

그나를 현재가 아닌 가능성을 내 미래의 가능성을 보아 달라고 했다.

꼭 성공하겠노라고 말이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욕심!

내가 성공 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나만의 욕심이다.

내 본질에서 끓어 넘치는 그런 욕심으로 나는 어느 순간 내 머리속에 준비된 짚불에

불을 당겨 놓고선 혼자서 슬퍼하고 혼자서 원망하고 북치고 장구치며

보내던 것이다. 그 누구도 나의 뒤를 쫒지 않았는데

나는 나 자신의 그림자와 발자국에 쫒겼던 것이다.

달아날수록 그림자는 바짝 쫒아 왔고 발자국은 더욱 많아졌다.

그래서 내가 더욱 더 빨리 빨리 달릴 수록 그림자와 발자국도

더 나를 몰아댔던 것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에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하나 뿐이다.

그늘에 가서 쉬는것 뿐이다. 그늘에서 쉬어야 그림자도 사라지고

그늘안에서 조금은 걷더라도 더 이상 나를 쫒아 오지 않는다.

난 그걸 모르고 땡볕에서 계속해서 뛰기만 했다!!!!

난 누나와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전략을 걸었다.

난 아버지에게는 찾아가 돈을 융통했다.

일부러 말도 안되는 금액을 부르고 당연한 거절에

이건을 도와 주시지 않으면 내 미래는 없는 것이니 나는 아버지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했다.

어파치 어머니는 이미 나같은 아들과 살지 않겠다며 새집을 알아보고 있으니

어머니와도 끝이라고 슬쩍 이야기를 흘렸다.

이른바 공공의적을 만들고 그 적으로 인해서 그들이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질 저급한 수작이었다. 내가 판단 하기로는

아버지는 아마도 우선은 걱정이 되겠고 아버지 입장에서

지금 상황을 보면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살면서 도박을 끊고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서

상태가 좋아진다면 어머니가 아버지 대신 나를 잘 보살펴낸 것이니

어머니앞에 체면도 서지 않고 보기가 껄끄럽겠지만

내가 어머니 밑에 있으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점차 이상해져간다면 아버지가

좀 더 편하게 어머니에게 다가 갈 수 있는 명분을 내가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

이후 누나는 아버지와 더 자주 연락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못내 실망스러운 내 모습에

결국에는 나라는 존재에게는 어머니 자신보다는 아버지라는 불빛이 나라는 불나방을

갱생시키고 올바른 곳으로 인도할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렇게 더 이상 난 다리를 놓지 않았음에도 내가 미친 돌 아이 마냥 양쪽에서

날뛰자 스스로 그들의 관계는 깊어지고 끈끈해져 갔다.

혀를 낼름 거리진 않았지만 원하는방향으로 일이 흘러간다는걸 직감했다.

이후 집에 드문 드문 들어갔다.

이렇게 내 이미지를 깍아가며 반대의 것을 취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었지만할 내가 공부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지름길이라고 확신을 했다.

도박이 답이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애초에 알고 있었다.

도박으로 어떻게 부를 거머쥔다는 말인가? 도박으로? 도박으로 말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난 그저 중독되어 있었고 늪에 빠진것을 알지만

나올 수도 없다는것 또한 알고 있었다. 변명일지도 모른다.

절박함이 없었던 것일 지도 모르지.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그들의 관계는 급 진전 되었고

내 전략의 결과로

나는 계약기간을 일주일 남기고 짐을 모두 빼버린 집에서

덩그라니 혼자 남게 되었다.

가족에게 버려져서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는 텅빈 방에서 수돗 물과 라면만 먹으면서 지내 본적이 있는가?

하하하. 난 참 젊은 나이에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고 상상하지도 못하는

비참한 상황을 너무나 많이 경험 한것 같다.

먹을것이라곤 라면 6개와 냄비 한개

어머니가 남기고간 김치와 잘 쉬지 않는 짠 반찬들 그리고 수돗물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마도 나는 한달에서 길게는 두달안에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정말 기뻤다. 친구 DY에게도 이야기 했다. DY는 공부라니

니가 드디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구나라고 이야기 했다.

이틑날 자고 있는데 꿈에서 박독기~ 박독기?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꿈에서 깻다.

깼는데도 박독기?? 하는 소리가 대문밖에서 들렸다.

나가보니 친구 DY가 연락도 없이 와 있었다.

DY는 나에게 맛있는 음식과 술을 대접해 주었다.

돈을 십만원 주면서 도박을 하라고도 했다.

나는 그 돈을 후라이드 치킨 닭다리 하나 먹는 동안에 날려버렸다.

DY가 그토록 기뻐하는 이유는 DY는 대구의 누구나 알아주는 명문고등학고 출신인데

그 고등학교에는 말도 안되는 선배들이 포진해 있었다.

대구는 보수의 심장과 같았기에 학연 지연이 너무나 끈끈해서

그 고등학교를 나와 잘 풀리면 출세를 하지 않는것이 이상했다.

DY는 서울대를 너무나 가고 싶었는데 계속 낙방 하게 되었고 나이가 들다보니

그 아래급의 대학은 도저히 가기가 싫고 그렇게 미적거리다 보니

점점 나이를 처먹어서는 그 역시 나처럼 또래의 레벨에서는 지금 너무나 떨어져있어서

지금이라도 서울대를 가거나

행정고시를 보고 싶다고 술에 진탕 취하면 항상 나에게 말했다.

DY는 내가 봤을때 정말 똑똑한 놈이었다. 웃 어른들이 이야기를 하기를 나를 보면

내 나이보다 앞선 생각 갖고 있다고 과분하게 평가를 해주는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생각 했을때는 DY는 나이보다 50년을 앞서가 있어서 그냥 할배였다. 푸하하핫

20년만 앞서 있었으면 뭘해도 할 놈인데 50년을 앞서니까 그냥 할배인 것이다.

푸하하하핫. 정말 웃기지만 진지하게 진심이다.

내가 몸만 젊었지 중년이라면 놈은 몸만 젊었지 그냥 할배였다.

그놈은 가끔씩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때면 그 말이 진심이라면

내가 느끼기엔 인간세상에 존재 하지 말아야 될 놈 같이 느껴졌다.

마치 벌을 받고 있는 사람의 느낌이랄까?

확실한 것은 내가 만난 또래중에 그놈은 나보다 그릇이 큰 놈이다.

나는 확실히 잔챙이고 병신이다. 병신대회가 있고

내 인생을 증거로 제출할수 있다면 입상은 따놓은 당상이다.

대구에서 내려온 놈한테 내가 대접해 주어야 했지만 난 돈이 없었다

사실 누가 돈을 내든 그걸 상관 할 사이는 아니었다.

DY는 항상 세미 정장느낌의 스타일로 깔끔하게 구두를 신고 다녔는데

항상 시계를 차고 다니지가 않아서 마침 내가 차고 있던 금색 시계가 어울릴 것같았다.

미안한 마음과 술도 거나하게 올랐겠다. 내가 찬 시계를 벗어주었다.

명품 시계는 아니었지만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브랜드이고

꽤 값이 나가는 시계인데 아깝지 않았다.

이제 공부할 것인데 저런 황금색 시계따위가 무슨 필요인가?

수수한 검은색 플라스틱 시계를 사고

다이소에서 탁상 초시계 천원짜리를 사면 그만이다.

드디어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시 합친다. 결국 내가 바라던 대로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시 합치고 시간이 조그만 지나면 나를 돌 보아 줄 수 있으리라.

그리고 후에 내가 조금 비비고 들어가서 도박을 그만 두겠다하고

내가 공부를 시켜 달라고 하면 공부를 할 수 있을 환경쯤은 충분 할 것이고

낮은 직급의 공무원이나 해먹고 살면서 그냥 안정되게 평범하게 산다면 부모님에게 행복감을

줄 수 있다. 친가나 외가에서도 평판이 쓰레기가 됬지만 최소한으로 내 얼굴을 다시 들수는 있으리라.

이년후 훗날 아버지와 술을 한잔 기울이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 당시 집을 계약 할때

나 역시 그 집에 들어오게 될거라 생각하셨기에 셋이 살기엔 조금 큰 집을 계약 했었노라고

이야기 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당시에 도박에 미쳐버려 정신병에 걸린 것마냥 보였던

아들 놈을 보면서도 결국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세상일이 입맛대로 척척 흘러 간다면 누구의 마음에도 그늘은 없을 것이다.

고사에 이르기를

강태공은 나이 오십이 가까울때까지 잉여인간처럼

백수로 지내며 낚시나 하고 책을 읽고 시만 읊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품을 팔거나 바느질을 해서 집안을 이끌어 나갔다.

한송이 꽃같은 나이에 시집을 와서 이미 중년이 되었는데도

집안의 가장은 전혀 변하는 것이 없으다.

그녀는 견디다 못 해 그를 버리고 집을 나갔다.

이후 강태공이 한 나라의 재상이되었다.

강태공이 마차를 타고 가다가 한 여인이 길을 가로 막으니 자세히 바라보니 집을 나간 전 부인이었다.

전 부인이 말하기를 청춘을 희생해 당신을 보필 하였으니 잊지 않았다면 도움을 달라고 청하니

강태공은 물동이를 가져와 그녀의 앞에서 깨버렸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다면 당신과 다시 살겠소"

전 부인이 얼이 빠져 우물쭈물 하고 대답을 못 했다.

그는 전 부인을 보며 했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쏟아진 물을 다시 채울 수 없다.
위빈지기(渭濱之器)
가난하지만 신념을 지키며 때를 기다렸다가 장차 큰 인물이 된다.
궁팔십달팔십(窮八十達八十)
인생의 전반부는 초라하게 살다가도 후반부는 영예를 누리며 산다

그리고 길을 열고는 앞으로 나아갔다고 했다.

나 같이 허접한 놈의 처지에 이런 고사를 빗대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달아주는는것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빗댄 이유가 첫째로는 현대는 고대보다 진주가 저렴하다.

그래서 애완돼지에게 애정이 깊다면 진주를 사주는건 어려운일이 아니고

둘째로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 하여도

나 자신만은 내 편이기에 난 내가 고사처럼 성공 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롭게 시작해서 행복한 가정을 다시 만들려 하셨지만

강태공이 내던진 물동이 처럼 얼마 못가 그것이 부셔졌기 때문이다.

진흙으로 그릇를 빗는것은 쉽지만

그 그릇을 깨버린 후 다시 원래대로 만드는 것은 누구도 할 수가 없다.

나는 가족이 다시 모여 살게 하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며 노력했다.

내가 이어 붙이려던 그 그릇은 원상복귀 되지 못하고 또 다시 깨어졌다.

지금 추축 하기로 아마도 그 이유는

다시 붙인 그릇에는 나라는 조각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겜블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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