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나기 까지

in #kr-pen5 years ago (edited)

고물님의 정말 너는 나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있어?을 읽고 몇 자 적어봅니다.


아내와 나는 가끔 이런 대화를 한다.

'오빠, 우리가 일찍 만났다면 애를 셋 넷은 낳을 건데, 너무 늦게 만나서 아쉬워.'

'그러게. 그런데 우리가 일찍 만났다면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난 아닐 것 같아. 너도 한 번 나도 한 번 실패했기에 그래서 지금 우리가 잘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결혼 5년 차인 우리 부부는 아직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다혈질인 아내가 화를 내면 내가 참으면 되기 때문이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하루 정도 참으면 아내의 화는 풀린다. 그러니 싸울 이유가 없지. 내가 참으면 되니까.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대단한 사람이다, 득도했느냐고 묻는다. 에이, 설마. 난 그저 보통 사람일 뿐인데. 내가 아내와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이유는 한 번 실패해봤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우리 오빠보다 더 착한 사람은 없을 거야.'

'나 별로 안 착해. 우린 늦게 만났고, 100살까지 산다고 해도 겨우 60년 동안 함께할 수 있을 거야. 사랑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왜 싸워. 그리고 내가 참으면 되는데 왜 싸워. 우리가 만약 일찍 만났다면, 그러니까 20대에 만났다면 우린 진작에 헤어졌을 거야. 실패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화를 냈을 거고 우린 피 터지게 싸웠을 테니까.'

'하긴, 오빠 별로 안 착해. 나한테만 착해서 더 좋아. 그러고 보니까 우린 서로 만날 거리가 없었네. 오빠는 서울에 살고 나는 인천에 살고. 서로 직업도 다르고 학교도 다르고. 활동반경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뭐 하나 건더기가 없네.'

'내 평생에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가 인천으로 이사 온 거야. 처음 이사 올 땐 정말 너무 오기 싫었어. 그래서 그 먼 거리를 통근버스 다니고 출근했지. 1년 동안 월세를 내면서 통근버스 타고 다녔는데 그 월세가 아까워진 거야. 그래서 기숙사 들어가려고 인천으로 왔지. 그런데 인천에 살아본 적이 있어야지. 아는 사람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서울은 너무 멀고. 그래서 나간 모임에서 널 만났으니 우린 하마터면 못 만날 뻔했지 뭐야.'

'나도 그날 나간다고 말해놨다가 못 갈 뻔했거든. 가장 늦게 도착했잖아. 일하느라. 그리고 오빠 첫인상은 영 아니었어. 그런데 내 옆에 붙어 앉아서는 자꾸 말 걸고 그래서 그냥 그러려니 했어. 근데 왜 첫날 전화번호 안 물어봤어?'

'들이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조심스러웠지. 그리고 우리가 운명이라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었어.'

'그런데 왜 일주일이나 지나서 쪽지 보냈어? 바로 안 보내고?'

'들이대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래서 일주일 동안 기다렸다가 쪽지를 보냈지.'

'오빠, 쪽지 내용 기억나? 난 인천이 처음인데 좋은 병원 소개해 달라고. 전번도 안 물어보고 말이야.'

'아하하. 말을 걸어야 하는데 딱히 걸 말이 없더라고. 대놓고 전번 알려달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래서 내가 그냥 쪽지 답장에 전번 적어 보냈잖아.'

'그랬지. 하하하.'

나도 아내도 그 모임엔 딱 한 번 나갔고, 그 후로는 나간 적이 없다. 나도 처음 나간 모임이었고 아내도 처음 나간 모임이었다. 우린 서로 처음 나간 모임에서 만났고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만났다. 그래서 아내는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라고 말한다. 못 만날 뻔했으니. 나도 그날 너무 심심해서 나간 모임이었다. 연휴인데 할 게 없었다. 집에 처박혀 책 읽고 글 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연휴 내내 집에 있자니 답답해서 나간 모임이었다.

그렇게 전화번호를 주고받고는 서로 카톡을 주고받았지만 만남이 이뤄지긴 힘들었다. 약속을 정하고도 아내는 매번 펑크를 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서울에서 독서 모임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보자고. 난 모임이고 뭐고 당장에 달려갔다. 아내는 날 처음 본 날 나를 별로라고 봤기에 그냥 자꾸 보자고 하니까 그냥 얼굴 한 번 볼까 싶어서, 그날 갑자기 저녁에 시간이 비어서 날 보자고 했다고 한다. 두 시간 정도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는데 딱 이거라는 표정은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집에 바래다주겠다고 말하고는 집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서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종교가 같았던 것. 결국 종교가 같다는 이유로 우린 주일마다 교회에 함께 가게 됐고 여기서부터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그 회사에 다니지 않았다면, 그래서 인천으로 이사할 이유가 없었다면 우린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계속 월세를 내면서 '난 절대 서울을 떠날 수 없어'라고 고집부렸다면 우린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기독교가 아니었다면 우린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가 만약 실패하고 삶을 리셋하지 않았다면 우린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직업은 달라졌을 테니 난 인천에 갈 일이 없었을 거고 우린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착해서 사장들하고 안 싸웠다면 이직을 자주 안 했을 거고 우린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아내가 삶에 실패하고 리셋하지 않았다면 우린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아내가 리셋할 때 빈털터리일 뿐만 아니라 빚도 수천씩 하지 않았다면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날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아내가 20대 시절 일했던 학원 원장과 계속 연락하지 않았다면 리셋 후 다시 그 학원에서 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날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아내가 그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실패할 일이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날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우린 만날 운명이었다. 나의 선택들이 모여 나를 만들었고, 아내의 선택들이 모여 아내를 만들었다. 그래서 우린 만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실패들이 아내를 만나게 해줬고, 아내의 실패들이 나를 만나게 해줬다. 우린 실패를 반복했기에 만났다.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다면 못 만났을 테니 난 나의 실패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의 실패들이 고맙다.

우리가 만나기까지 수많은 실패가 있었다. 수많은 아픔이 있었고 수많은 고통과 수많은 눈물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 모든 실패와 아픔과 고통과 눈물이 고맙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내를 만나게 해줬으니까.


Sponsored ( Powered by dclick )
스팀달러 가격이 벌써 900원을 넘어섰네요.

52주 최저 가격인 538원까지 내려갔었는데 어느새 915원이네요. 드디어 1달러(USD)에 ...

Sort:  

제 글을 읽으신 후 이렇게 예쁜 글을 써주시다니 제가 한 것 없지만 괜히 기쁘고 따뜻해지고 ㅋㅋ

좀 놀란게 나하님이랑 제 남자친구랑 많이 비슷하세요. 저는 좀 다혈질이고 감정기복도 심한데 제 남자친구는 정말 안정적이고 침착한 사람이라 제가 싸움(?)을 걸어도 싸우지 않아요. 그래서 스키장갔을때 빼고는 ㅋㅋㅋ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저도 이런 비슷한 생각한 적 많아요. 누군가 제게 말해 준 '어차피 벌어질 일은 벌어지기 마련이야.' 이기도 하고요. 제 삶이 다 제가 선택하고 끌어들였기 때문에 지금 여기 제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거더라고요.

사람이 인연을 만드는데 우연이든 운명이든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런 사람이고 상대방이 그런 사람이고 그런 선택을 해서 저희가 만났던거죠. 참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죠..

스팀잇을 통해 만난 인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D 예쁜 글 감사합니다.

앗,,, 제가 감사하지요. ㅎㅎㅎ 고마움을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요. ㅎㅎㅎ

나하님 글 읽고 있으면 무슨 인간 승리 같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사셔서 그런가봐요.

앗,,, 네? ㅎㅎㅎㅎㅎ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

아픔을 통해서 성숙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군요. 글을 아주 잘 쓰세요. 물론 소개란에도 있듯이 글을 쓰시는 분이니까 그렇겠군요. 좋은 글 많이 쓰세요.

아핫. 주 수입 2천원인 프로작가입니다. ㅎㅎㅎㅎㅎ 좋은 말씀 고마워요. ^^

Congratulations @naha! You have completed the following achievement on the Steem blockchain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You received more than 10000 upvotes. Your next target is to reach 15000 upvotes.

Click here to view your Board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Do not miss the last post from @steemitboard:

SteemWhales has officially moved to SteemitBoard Ranking

Support SteemitBoard's project! Vote for its witness and get one more award!

고마워~~

nTOPAZ 스팀잇 계정 팔로우 이벤트(최대 $1.25 👍)

참여 감사합니다 😊


아름다운 사랑이네요. 부러워요 형님!

헛... 고맙습니다. ㅎㅎㅎ

Coin Marketplace

STEEM 0.27
TRX 0.12
JST 0.031
BTC 68526.92
ETH 3726.80
USDT 1.00
SBD 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