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고

in #kr2 years ago

태풍 '힌남노'가 지나가는 밤에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태풍이 지나가고>를 다시 꺼내 봤다. 이 영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왜 '태풍이 지나가면'이나 '지나간 뒤'가 아니고 '지나가고'일까?

만약 제목을 '지나가면'이나 '지나간 뒤'라고 썼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변화를 예감하게 된다. 태풍이 시련을 은유한다면,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 주인공의 삶과 일상에 모종의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레에다는 그냥 '지나가고'라고 썼다. 태풍은 매년 오고 23호인지, 24호인지 분간이 안되는 그 기상 현상은 그저 지나간다. 희생자가 생길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태풍은 일상에 툭 치고 들어왔다 하룻밤 사이에 지나가는 기후현상일 뿐이다. 우리 삶에는 그렇게 크고 작은 태풍이 지나간다. 어떤 태풍은 '초강력'이라는 뉴스의 호들갑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무심하게 지나간다. 그렇듯 어떤 아픔은 큰 상처를 남기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 휴먼 드라마는 대중영화의 문법인 신화성을 곧잘 배신한다. 신화성을 최대한 간단하게 말하면 '주인공이 역경을 통과하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대부분의 대중영화는 이 문법을 따른다. 인류가 가장 감흥을 얻을 수 있는 보편적 스토리텔링 작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태풍이 지나가고'는 애써 주인공의 변화나 반전을 보여주지 않는다. 흥신소에서 일하는 어느 한심한 아빠이자 전남편이 태풍이 불어닥친 어느 밤 어머니의 좁아터진 집에서 이혼한 전처, 아들과 함께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래서 그들 가족은 감동적인 재회의 드라마를 만들어낼까?

그랬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가 아니다. 무심한 일상성 속의 행동과 대사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고레에다가 천착하는 영화적 문법이다. 사실, 그게 우리의 진짜 삶이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때론 다투고, 그렇게 부대끼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고, 그 안에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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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글은 SteemitKorea팀(@jungjunghoon)님께서 저자이신 @madoasis님을 추천하는 글입니다.
소정의 보팅을 해드렸습니다 ^^ 항상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SteemitKorea팀에서는 보다 즐거운 steemit 생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다음날 다시 한번 포스팅을 통해 소개 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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