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민주주의

in #kr2 years ago

"그보다 더 많이, 그보다 더 멀리"를 외치면 대한민국을 양분하는 두 세력, 그러니까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다 욕을 먹는다.

보수는 당연히 "빨갱이 새끼"라고 욕할 것이고 진보는 짐짓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비현실적 이상주의"라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얘기냐면, 나는 1987년 직선제 쟁취로 시작된 절차적 민주주의 패러다임(양당 권력 체제)이 수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는 한쪽의 기성 권력에 유리한 어제의 반정부 촛불 집회도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같은 날 열린 보수 집회는 말해서 무엇하랴.

시대착오의 물결이 도심을 꽉 채운 즈음에 나는 인천의 작은 극장에서 재일동포 3세 연극인 김철의 씨가 연출한 작품을 감상했다.

그가 연출한 '주작의 향기 바람'이라는 작품은 한국어와 일본어 연극으로 잇따라 상연됐는데, 그래서 일본어 공연을 못알아들어도 그 뉘앙스는 뚜렷하게 다가왔다.

재일동포 3,4세, 특히나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조총련의 영향권에 있었던 자녀들의 생각이 그의 작품에는 녹아 있다. 그들에게 사상, 이념, 정의, 민족 따위의 패러다임은 이미 낡았다. '아톰'의 데즈카 오사무가 죽었는데 세상이 그대로란 게 믿겨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세대다. '자이니치'라는 정체성의 감옥을 뛰어 넘어 세계를 구하는 울트라맨이 되고 싶은 낭만이 '무죄'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그들에게 부조리란 과연 무엇인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경계하는 것은 일본이나 남한이나 똑같다. 자유롭게 상상하고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자주, 그들의 태생과 성장 환경에 의해 가로막힌다. 그러니 그들에게 부조리란 '상상력을 결여한 그들만의 정의, 박제 민주주의'일지도 모른다.

나는 문화예술인 문재인 지지 선언에 동참했다가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도 감수하고, 2016년 겨울 매주 촛불을 들었다. 그러나 그 정권의 5년 치하가 완전히 실패했다고 진단한다. 단지 선거에서 진 게 실패는 아니다. 진보의 동력을 상실한 게 실패다.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건 좌절의 시기다. 그래서 나는 이른바 '진보'를 말하는 이들이 충분히 절망하고 충분히 고민하고 충분히 고통스러워 하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두루뭉술하게나마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저들의 정의, 한줌도 안되는 권력자들의 파이 나누기를 위한 대리인으로 자발적 동원되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거리에서 외쳐지는 정의는 호사스러운 정신적 취미 생활이 되었다. 검찰 독재가 정의를 산산조각 내고 있다고 말한다.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끝내 묻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정의가 살아 있을 때 이웃들은 살기 좋았나? 대관절 우리의 현대사에서 정의가 살아 정직하게 사는 이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나?

나는 여전히 답을 갈구한다. 그러나 누구도 왜 민중이 이토록 고통스러워졌는지, 정의를 말하던 정권 하에서 어찌하여 그것이 더 심화되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니 답은 멀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무엇이고 누가 진보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전에는 촛불마저 냉소할 수밖에 없다.

학창시절에 이런 고민을 하는 학우들에게 운동권은 늘 말했다. "행동하는 게 우선"이라고. 그렇게 주장한 이들 모두, 거의 예외 없이 한 자리씩 차지해 채권 추심하듯 기성 권력의 부스러기를 먹고 산다. 그래서 또 한번 진보가 처절하게 실패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다. 실패를 인정 못하면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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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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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글은 SteemitKorea팀(@jungjunghoon)님께서 저자이신 @madoasis님을 추천하는 글입니다.
소정의 보팅을 해드렸습니다 ^^ 항상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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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음날 다시 한번 포스팅을 통해 소개 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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