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감정] 02 감정을 드러내는 거리

in #kr-series6 years ago

감정을 드러내는 거리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감정은 대부분 잊힌다. 강렬했던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사라지기 마련이다 (물론 때로는 나를 놔주지 않는 감정이 있긴 하다) 감정은 사적이고 상대적이다.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 감정은 영원히 내 마음속 비밀처럼 간직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냥 그렇게 감정을 마음에 담아두기를 선호하고 다른 이는 꼭 표현하길 원한다. 어쩌면 사람을 만나는 건 감정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일, 서로에게 드러낼 감정의 거리에 따라 그저 지인 혹은 친구나 연인 같은 특별한 관계로 구분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람과의 적당한 거리는 어디쯤일까? 그 지점은 서로 합의될 수 있는 걸까? 오늘은 감정의 거리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01 감정을 드러내니 치유가 됐었다.

우울했다. 아니 우울한지도 몰랐다.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았다. 혼자 고립된다. 어느 날인가 나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이러다 죽겠다 싶을 때쯤 병원에 가게 되었다. 약을 먹고 상담을 하면서 우울한 감정은 많이 사라졌다. 그때 배웠다. '감정은 표현하는 거구나.' 해결되는 게 없어도 말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위안이 되는 거구나. 나는 내 감정을 억압하지 않기로 했다. 관심을 가지고 알아주고 나누고 공감하면 괜찮아지는 경험을 했고 내게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무렵 첫사랑을 했다. 그는 내 연애의 기준점이 되었다. 우리 사랑에 연애 감정이 3 정도라면 서로를 보듬어주는 마음이 7 정도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내 아빠가 되어줬던 것 같다.

나는 세상 가장 견고해 보이는 가족이라는 관계조차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굉장한 충격을 받은 직후였다. '아, 엄마도 아빠도 나를 떠날 수가 있는 거구나. 당연한 게 아니구나.' 그게 어린 내겐 굉장한 충격이었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사람을 믿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나는 그를 만났고 나의 애정 결핍 욕구를 빈틈없이 채워주었다. 나를 무조건 사랑해주었고 관계에 대한 불안한 내 마음에 확신을 주었다. 가족도 해줄 수 없는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다른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는 거구나. 그래서 그에게 비밀 같은 건 없었다.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가장 내밀한 감정도 그에겐 아무 부담 없이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있었다.

눈이 펑펑 오던 밤, 평소 20분쯤 걸리는 그 거리를 1시간쯤 걸어 눈사람이 된 상태로 그의 집에 도착했다. 연락도 없이 멋대로 찾아와 문을 두드린 채 멍하게 서 있는 나를 보고 놀라 눈을 털고 이불을 덮어주며 말없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그. 우리 사이에 선이 없었다. 내 멋대로 굴어도 나를 책망하지 않았고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감정을 내뱉어도 놀라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주었다. 그의 모든 걸 알고 싶었고 나의 모든 걸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연인이 되면 그래도 되는 줄만 알았다. 아니 그래 줄 수 없다면 연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02 풋내기 시절의 연애

새내기 시절 풋풋한 연애를 했다. 동갑인 그 남자애는 동아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그는 날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좋아한다고 남자답게 고백했다. 우리는 곧 사귀게 되고 설레고 행복한 순간이 가득했다. 뭐랄까 그건 내 인생에서 드물게 존재하는 청춘 로맨스물 연애였다. 처음에는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갔다.

나의 요동치는 감정을 제외하고 말이다. 나는 그때 지금보다도 더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에 늘 지배받고 있었다.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으니 오히려 내 마음은 불안해지고 감정의 동요가 생겨났다. 그리고 난 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남자애에게 내 부정적이고 어두운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래서 사귄 지 한 달 만에 나는 그 남자에게 장렬하게 차였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반수를 한다는 이유로 애매하게 내게 거리를 두는 그 남자에게 술 한 병을 마시고 전화해서 헤어지고 싶으면 제대로 말하라고 진상을 부리니 몹시 어렵게 그의 헤어지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무얼 잘못한 건지 그냥 이별이 슬펐을 따름이지.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해보니 그에게 참 미안한 게 많았다. 아마 그는 평범하게 데이트하고 가끔은 사소한 일로 투정을 부리고 질투도 하다가도 어느새 화해하고 같이 공부도 하는 그런 캠퍼스 생활을 함께할 발랄한 여자 친구를 기대했을 텐데.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세상 다 산 표정으로 죽는소리를 해대며 어쩌지 못하는 부정적이고 다크 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그에게 표현하곤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새내기의 연애란 무릇 그런 것일 리 없었는데….

연인이라고 감정을 모두 표현해도 되는 건 아니었다. 스무 살의 나는 어리석게도 몰랐다. 나도 감당할 수 없는 내 감정을 타인에게 받아들이라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건 참으로 이기적인 태도였다.


03 거리 설정

그렇게 나는 살아가면서 경험에 근거해 각자의 거리 설정을 하게 된다. 이 친구와는 여기까지, 저 친구와는 거기까지 우리가 서로 불편해지지 않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적당한 감정의 거리를 재기 시작한다. 그 감정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내겐 더 친하고 특별하단 의미가 되었다.

내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네가 힘들 때 외로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

과거에는 행복이나 즐거운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슬프고 우울하고 비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친구라면 부정적인 감정까지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다른 이에게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물론, 속상한 일이 있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친한 사람과의 대화는 도움이 된다. 그 일을 잊고 훌훌 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좀 더 근본적인 절망과 부정, 자기비하 같은 단단하고 무거운 감정은 타인의 행복까지 앗아가곤 했다. 그건 누가 뭐라 한다고 위로가 되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에 가닿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어 냈고 그 사람과 그 감정이 조건화되어버려 만남을 피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 상대의 감정에 지쳐 벽을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고 나는 나로 인해 누군가가 그 벽을 보고 있을까 두려워졌다.

내 감정 하나 감당하기도 버거운데 사는 것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루를 버티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의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답 없는 문제를 공유하며 괴롭히고 싶지 않게 되었다. 혼자서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감정이 있다. 어떤 감정은 표현하지 않고 묻어두는 게 좋을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가까운 사이에서도 자연스레 정리된 이후에야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졌다.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게 정제된 감정을 조심스럽게 꺼내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었고 내가 이렇게 느꼈지만, 지금은 괜찮다고 과거의 일로 만든 후 서로의 감정을 나누는 일이 많아졌다.

어쩌면 예전보다 감정을 드러내는 거리가 좀 더 멀어졌을지 모른다. 오히려 조금 거리를 두니 알겠다. 내가 책임져야 할 못난 감정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주는 상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또 여전히 내게 말하기 어려운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지. 마지막으로 꼭 감정의 거리가 관계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척도가 아니라는 사실도.

여전히 난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감정을 드러내도 될 만한 적당한 거리를 끊임없이 재고 있다.


[안녕, 감정] 시리즈
01 입장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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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너무 좋아요 좋은 감정을 거리없이 드러내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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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헷 한 명쯤은 서로 아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게 인생에 큰 위안과 위로가 되더라고요. 좋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감정은 함부로 드러내다가는 쫄망 하는수가 있던데.....

ㅎㅎ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ㅋㅋ 늘 조심해야죠 ^_^;ㅎ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지하게 읽으며 내려오다가 빵터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전히 난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감정을 드러내도 될 만한 적당한 거리를 끊임없이 재고 있다.

마지막 문장이 이 글을 쓰는 현재의 고물님의 마음상태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일까요? ㅎㅎ 감정은 저도 늘 끊임없이 생각하는 주제인데, 여태까지 만나왔던 그리고 내 기억속에 존재하는 만남의 기록을 따라 가는 주제로 풀어보니 이런 멋진 글이 되는군요. 저도 마구 퍼주는 성격이라 거리 설정 부분이 가장 힘듬에 공감합니다. ㅠㅠ

글을 한참 읽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니 그 문장으로 마무리 되더라고요.
어쩌면 억지로 감정에 대해 짜맞추어 글을 썼다는 생각을 했는데 ㅠㅠ 이렇게 공감을 해주시니 기뻐요:D

laylador님 마구 퍼주는 성격이시구나. 그러다보면 꼭 적당한 거리 설정이 필요하겠다라는 생각이 필연적으로 드는 것 같아요. 시간에 따라 문맥에 따라 달라지곤 하는 적당한 거리 정말 어렵죠

감정 연재물에 제가 슬쩍 원했던 옛 얘기가 나와서 너무 반가웠는데, 백번 공감돼요. 어렸을때 서툴었던 감정도, 지금에서야 비교적 이성적으로 따지게 되는 어른이 감정도 상대방과 맞는 타이밍에 적당한 거리를 필요로 하죠. 마구 퍼주다가 아니다 싶으면 딱 버려야 하는데, 미련만 많아가지고 그게 잘 안되는 것도 참 힘들더라구요. ㅎㅎ 공감천재 고물님 연재 화이팅이에요. ^^

전 사실 미련많고 조절을 잘 하지 못해 고민하는 사람에게 무척 마음이 가더라고요 ㅋㅋㅋ 감사합니다. 랄라님 응원받고 힘내겠습니다!!

^^ 이런 진솔한 글 보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을 하게 됩니다. 고물님 글에는 그런 힘이 있으세요. 저는 이런 고민을 해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생각해보게 되네요^^

아니 레이븐님 그런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해주시다니-
사실 스팀잇 사이의 거리 설정이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아서 마구 솔직해져버리고 맙니다.ㅋㅋㅋㅋㅋ

헤헷 이런 고민 안하고 사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마세요 레이븐님 ㅋㅋㅋㅋ 새벽이 되니 상태가 메롱하네요. 얼른 자야겠어요! ^_^ 좋은밤 보내셨길

감성을 호출하는 글이네요. 그런데, 전 대인관계에서 제 생각이나 감정, 솔직한 과거사 등을 잘 얘기하는 편인데, 그 얘기를 듣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부정적으로 절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그렇게 호의적으로 여기고 얘기해주는 것 자체에 더 마음을 여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여하튼 글 잘 읽었고, 저도 평소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지만 이 글 읽으며, 제가 드라마 보며 자주 훌쩍거리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금방 하게 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헤헷. 조선생님 감성을 호출했나요? 늦은밤 적어내려간 글이라 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댓글을 읽고 나니 저도 그런 경험도 많았던 것 같아요. 제 생각, 감정, 과거를 솔직하게 말해줬을 때 호의적으로 생각해주셨던 적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럴 때 뭔가 마음이 통하는 기분 교감하는 기분을 느끼죠:D 제가 보지 못한 부분을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려요.

감정표현은 잘하지 않지만 드라마 보며 훌쩍 거리시는군요 ㅋㅋ모습이 상상되서 웃음이 나요. ^_^ 새해복 많이 받으시길 :D

내 감정을 나도 이해하지 못 하는데 그걸 고스란히 받는 옆에 있는 사람은 더 혼란스럽겠죠. 내가 먼저 내 감정을 헤아려 줘야 될 것 같아요.

맞아요 맞아. 그건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행위다라고요. 그런데도 운이 좋아 그 혼란까지 기꺼이 받아주는 사람들을 만났었죠. ㅎㅎㅎ
이젠 어른이 되었으니 제 감정은 제가 헤아려야죠. :D

감사합니다 고물님 ㅎㅎㅎㅎ

으잉? ㅋㅋㅋ
사..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저도 감사드립니다 :D

이미 말로 다하였기에 ㅋㅋㅋ 더이상 드릴말씀이 없는거 아시죠?ㅋㅋㅋ

감정은 표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ㅎ
그래야 안에 남아 있는게 없고 내 안에 쌓여 있었던 감정 찌끄러기가 없어진다고 생각 하거든요 ㅎ
근데 그 표현의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서는 안되겠죠

ㅎㅎ 맞아요 감정 찌그러기 쌓아두면 마음이 너무 답답해져요. swetpapa님 어떻게하면 건강하게 감정표현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소중한 사람이 받아준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고 노력중이에요.:D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잘 읽습니다. 저 같은 경우엔, 먼저 제 감정을 새밀하게 린식하니 표현이 자연스럽게 되더군요.

저도 언젠간 감정때문에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seoinseock님은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게 감정의 교류가 가능하실 것 같다는 ^_^ㅎㅎ인식, 자각 전 아직 훈련중이에요.(가끔은 망각할 때도 ㅎㅎ)

^^ 저도 여전히.. 훈련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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