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개의 불상이 있는 절.

in #busy6 years ago (edited)

영천과 경주 사이의 애매한 공간에 위치한 큰 절이 하나 있다. 차를 몰아 국도를 지나는 길손의 눈길을 끄는 큰 불상이 산꼭대기에 슬며시 보이는 절. 종종 그 앞을 지나기만 하다가 비 내리던 초여름 어느 날, 궁금해서 한 번 들어갔다. 돼지족발의 사이즈가 소/중/대에서 어느샌가 양은 더 줄었으나 이름만 중/대/특대로 바뀌었고 메가톤바는 크기가 70ml로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메가톤이라는 이름을 가진, 언어의 인플레이션이 극심한 세월이긴 하지만 절이 얼마나 크길래 이름에 萬이 들어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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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이나 자격증 학원 입구에 붙은 ‘합격’이라는 단어, 경기장에 붙은 ‘필승’이라는 단어, 헬스장 광고에 붙은 ‘체중감량’이라는 단어, 사이비 의술의 광고에 붙은 ‘암 극복’이라는 단어가 그 행위의 성공이 어렵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어릴 때는 그런 광고문구가 그 성공이 쉽다는 걸 말하는 줄만 알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절 입구의 ‘성불기원’이라는 말이 서글프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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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입구를 들어서면 법당과 탑이 나온다. 이 절은 땅 자체가 서원書院처럼 3단 구조로 되어있다. 서원의 1단이 기숙사, 2단이 강의당, 3단이 위패를 모신 사당인 것처럼 여기도 특별한 의미를 갖고 그렇게 만들었나 싶어서 우선은 오르막을 올라가 본다. 내려다본 풍경이 왠지 영화 세트장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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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주차장에 내리니 옆으로 오솔길이 있고 그 너머 키 큰 불상이 보인다. 매번 길을 갈 때 보이던 희미한 노란빛의 주인공인가보다. 이런 촉촉하고 푸른 길이 있다는 걸 더 일찍 알았다면 대구에서 경주를 다녀오는 길에 몇 번이고 들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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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의 끝은 불상들의 공원으로 이어진다. ‘사람 궁디가 아무리 크다 한들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의자, 같은 외모와 크기의 몰개성인 군중 속에서 돋보이기 위해서는 마이클 잭슨의 무중력댄스 정도의 기술은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삐딱한 불상이 눈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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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 아래의 불단에는 또다른 작은 불상들이 촘촘하게 박혀있고 각 부조별로 시주한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한 면에 최소 260개, 8면에 걸쳐 최소 2천개의 부처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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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大佛은 수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불상인 모양이다. 여기 이름이 남아있는 사람들 모두의 소원은 이루어졌을까? 내 키 보다 조금 작은 불상들에는 가족단위로 이름을 넣을 수 있는 철판이 붙어있다. 부처님 오신 날에 절에 가서 금액에 비례한 크기와 디자인의 등을 각각 달면서 사업번창, 가족건강 등의 소원을 빌 듯, 무언가를 바라면서 이름을 붙인 것 같기도 하고 돌아가신 조상의 명복을 빌며 이름을 붙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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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리스트에 '대불상 도색 불량, 잔디밭에 금박 떨어져 있음'이라고도 써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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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구경을 끝내고 주차장에서 차를 돌려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부도탑들. 추모 공간이 있는데 마침 어떤 가족의 장례식이 보였다. 불교신자라면 여기저기 흩어진 가족묘를 돌무덤에 모아서 안장하는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기적인 벌초 없이도, 잡목이 우거진 오솔길을 매년 톱으로 헤쳐가지 않아도, 자가용으로 코앞까지 접근할 수 있는, 내가 아는 조상들을 한 곳에서 모두 만날 수 있는 무덤이라니. 내가 결정권을 가진 제주祭主라면 여기에 가족묘를 세우고 싶을 것 같긴 하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광고판의 “기본사항: 반영구적 관리, 옵션: 천도재, 기제사”라는 구절과 천만 원 단위의 가족묘 조성 가격을 보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저 깊숙한 곳으로 쏙 집어넣었다. “말티즈 팝니다: 혈통보증서 있는 순종이 49만원”이라는 내용을 슬쩍 돌려서 “강아지 분양합니다”라고 표현하듯이, 아직은 죽음에 대해서 노골적이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행하던 친구가 불쑥 말을 꺼냈다. “대구야, 내 얼마 전에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49재 지내는데 8백만원 들었다. 불효했다는 생각에 장례 치르면서 한 번도 돈 깎아야겠다는 생각을 안 해봤다. 관도 좋은 거 쓰고 수의도 좋은 거 하고 제사도 좀 비싼걸로 지내면서 그냥 잘 해주이소라고만 말했거든. 지나고 나니 왜 그렇게 했나 싶은 마음 조금 들기도 하는데 그 때는 그렇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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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입구. 누군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름을 붙여놓은 불상들, 이유는 모르지만 동전이 얹힌 석불. 이 동전의 의미는 뭘까. 예전에 통도사에 갔을 때 작은 연못 바닥을 빈틈없이 채운 동전들을 보았을 때처럼 그냥 그 의미가 궁금했다. 등산로에는 돌탑을 공덕삼아 쌓지만, 연못이나 석불에는 돌을 던지기 좀 뭣하니 동전으로 바꾸어 무언가를 비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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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1층을 둘러보고 건물내부의 계단을 오른다. 계단의 조명과 공간이 몽환적이다, 게임에서 봤던 풍경 같기도 하고. 왠지 백남준이 이 모습을 보면 본인의 작업에 이 이미지들을 썼을 것 같다. 작품 중에 '붓다' 어쩌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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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2층.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작은 불상 하나에 이름 올리는데 1개월에 1만원이라 치고 1년치 금액을 계산을 하려다가 말았다. 무량대수니 겁이니 항하사, 불사사의니 하는 불교의 숫자 스케일만큼이나 계산하기 부담스러웠다. 이 많은 사부대중의 근심을 덜어주는 그야말로 대승사찰이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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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생전에 건강하실 때 절대 당신을 절에 맡기지 말라고 하셨다. 다른 건 다 됐고 산 사람이나 잘 살고 있으면 그게 당신이 가장 바라는 것이라 하셨다. 땅에 묻을 필요도 없으니 수의니 관이니 하는 쓸데없는데 돈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남은 사람의 생각은 항상 먼저 간 사람의 생각과 다른 법이다. 비 오는 날마다 강둑에서 울어대는 청개구리가 말해주지 않는가. 할머니는 ‘생략’을 말씀하셨겠지만 남은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모든 옵션에서 ‘중상급’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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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청소기가 다소 이색적으로 보였지만 문턱도 없는 넓은 공간이니 내가 아는 그 어떤 장소보다 로봇청소기가 효율적인 공간이겠다. 어쩌면, 이 날 절에 있던 그 누구보다 먼저 해탈하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하며 절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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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하게 꾸며놓았네요 제가아는 산사이미지는 아니고 웬지 홈플러스 분의기 나네요

돈이 오가는 곳이라 다른 분야와 비슷하게 대형화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은 것이 일반적이던 추모공간이 커지는 데 대하여 알 수 없는 어색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고속도로 다닐 때마다 규모가 큰 불상이 눈길을 끌었는데 절의 모습은 또 저렇게 많고 큰 모습이었네요.

가까이서 보니 일반적이지는 않은 풍경이었습니다ㅎㅎ앞으로 저런 곳이 두어군데 생기지 않을까 싶네요.

ㅎㅎㅎ혹시 인터넷검색전문기술사 자격증 같은 거라도 갖고 계신 거 아닌가요?

아뇨..예술 배웠어요..

엇. 지난번 현대미술관 가신 포스팅에서 저하고 너무나 비슷한 시각을 보여주셔서 그쪽 방면으로 공부하신줄은 몰랐습니다. 찾아서 올려주신 덕분에 예전에 어디선가 힐끗 보고 지나갔던 백남준의 TV부처.. 검색도 해보고 한 번 더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작가분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제게 일반현대예술 지식이 있는데 시각이 대구님과 똑같습니다. 정황상 예술에 기준과 향유층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일반인과 친숙해지는 것은 요원해 보입니다.

아마 모든 사람이 현대미술과 친숙해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일겁니다. 그럴때쯤이 되면 다른 개념의 미술이 또 튀어나와 새로운 향유층이 생길 것이고 일반인들은 저게 뭥미를 외치겠지요. 이게 전부 뒤샹의 변기탓이 아닐런지요.

뒤샹이 개박살낸 드넓은 현대미술의 정의상 복고주의가 일어나서 옛날처럼 한다가 아닌 이상 현재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변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이해하는 사람이 점점 늘기는 할까 싶습니다.

금박인줄 알고 잽싸게 주웠더니 페레로로쉐 껍질이었다는 반전

ㅋㅋㅋ불상에서 떨어져나온건 확실한데 금은 아니더라고요. 페로로로쉐 껍데기가 더 비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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