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in #kr-newbie7 years ago

지난 여름, 강아지들과 산책을 나간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내는 산책하다 만난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온다고 했다. 워낙에 경계심이 많은 성격이어서, 나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연신 "응? 뭐라고?"를 반복했다. 아내의 말은 별다른 해석이 필요하지 않았다. '산책하다 만난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간다.'
나는 부랴부랴 옷을 주워입고 집을 대충 정리하면서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혹시 아내가 무슨 일을 당한 것은 아닌지 잡다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함께 들어오신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였다. 굳이 묘사하자면 얼굴은 괴짜가족의 진을 닮으셨고 머리는 적당히 하얗게, 턱까지 내려왔다. 말씀도 곧잘 하시고 거동도 잘 하셨다. 그러니까 그냥 동네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성당을 다녀오시는 길이라고 했다. 집에 가는 길에 마주친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을 예뻐하다가 아내에게 우리 집에 가보고 싶다고 했단다.

아내는 거절했지만 연신 부탁하시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차라도 한잔 드리고 보낼 요량으로 집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나는 물을 끓여 녹차를 내왔다. 상황이 불편하여 얼른 드시고 가셨으면 싶었다. 할머니는 당신 아들 이야기로 시작하여 사별하신 남편, 성당,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 이 동네에서 아주 오래 사셨고, 동네 주민들과도 다 친하며, 하느님을 신실하게 따른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벽에 걸린 결혼 사진을 보고 아내와 내가 아주 예쁘고 잘생겼다는 말을 하시곤, 강아지를 맡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며 번호를 알려주고 가셨다. 물론 연락을 드린 적은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도 몇 번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우리 집은 아니었고 보통은 강아지를 산책시키다 마주치는 경우였다. 할머니는 꽤 자주 밖을 돌아다니셨는데, 항상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시거나 혹은 동네 입구의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마시고 계시거나 했다. 그런 일이 몇 번 생기니 나는 할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경계심도 차츰 누그러져 나중에는 내가 먼저 알은 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할머니는 항상 처음 만난 사람 처럼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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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밤늦게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동네를 배회했다. 날이 부쩍 추워서 잰 걸음을 옮기는데 편의점 앞에 경찰차가 서있었다. 차 옆에는 두 명의 경찰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할머니였다. 무슨 영문인지 경찰은 다그치듯 무언가를 물어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당황한 표정이었고,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는 듯 했다.

사실 이 부분에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할머니께 인사만 드리고 화급히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기억나는 부분이라고는 경찰이 "그러니까 할머니, 여기서 왜~" 어쩌고 저쩌고 했고 할머니는 "아니 내가 이동네에 사는 사람인데..." 어쩌고 저쩌고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할머니를 지나쳐 곧장 식당으로 들어가 허기를 달랬다. 돌아오는 길에는 경찰차도, 할머니도 없었다.

어찌보면 별 거 아닌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는, 할머니의 눈빛 때문이다. 인사를 건네는 찰나에 마주친 할머니의 눈빛은, 비교하자면 겨우 막차를 타고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는데 장대비가 내리고 있는 상황이랄까. 마치 나에게 "자네는 날 알고 있잖아. 뭐라고 말 좀 해줘요. 나 이상한 사람 아니라고."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냥 "안녕하세요? 어..." 하고 나는 우산이 있으니 먼저 갈게요 라고 말하듯 무심히 지나가 버렸다.

할머니는 나를 모르셨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내가 할머니를 모른 체 하고 지나갔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마 할머니는 별일없이 잘 들어가셨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동네를 산책하시며 누군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계실 수도 있다. 할머니가 인터넷을 하시지는 않을 것 같으니, 다음에 할머니를 만나면 따뜻한 커피 한 잔 사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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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교류를 하기에 우리나라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할머님의, 철수2님의 상황 모두 공감하기에 가슴이 더 먹먹하네요.

공감합니다. 오죽하면 길에 누군가 쓰러져 있어도 섣불리 도와주지 말라고 할까요. 무뎌짐을 훈련해야 하는, 고독한 세상입니다.

글을 읽어보니 많은 생각이 드네요.
나라면 저런 상황에서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많은 편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아서 슬프네요ㅜ

댓글 감사합니다. 이 포스팅도 사실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풀어낸 얍삽한 변명이었습니다.

커피를 전해드리려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보내주신 스달 잘 받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아이고 민망하여 몸이 베베 꼬입니다. @woo7739 님께서 안내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일입니다. 두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산. 지나간 일을 다시 떠올리며 가슴 한 켠이 갑갑했을 글쓴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최근에 할머니를 뵈었는데, 아니 발견하였는데 워낙 멀리서 잰 걸음으로 사라지셔서 빚을 갚지 못했네요. ㅠ

커피 한잔에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네요~^-^

따듯한 글 감사해요~ 팔로우하고갈게요 소통하고지내요~

좋은 활동을 많이 하시더라구요. 덕분에 스팀잇에 조금 더 빨리 적응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할머니가 찰나에 내뿜는 눈빛을 제가 본 것 같아요.
철수님의 다음글을 기대합니다^^

응원의 댓글 감사합니다. 몰래몰래 보얀님의 글도 훔쳐보고 있습니다. 자주 포스팅해주세요~!

저라면 아내분처럼 쉽사리 집에 모시고 오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아내분이 참 마음이 따뜻한 분이신 것 같아요. 철수님도 할머니의 짧은 눈빛을 읽고 내내 마음에 걸려하신 걸 보면 정말 따뜻하신 분 같습니다... 그리고 경솔하게도, 할머니의 외로움. 같은 감정을 짐작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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