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 002

in #kr-pen5 years ago

대답을 듣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그가 사라졌을 거라는 걸. 신기하게도 그는 여름이 시잘될 쯤 사라졌다고 했다. 그게 다였다.


멍하게 누워있다가 Astin에게 말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도 화도 내지 않고 모든 걸 다 듣다가 물었다. 그게 무슨 실효성이 있냐고. 난 모든 게 실효성이 있어서 하는거냐고 되물었다. 그는 어쩌다 생각의 흐름이 그렇게 바뀐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했다. 그리고 뭐가 되었든 무언가를 원하는 나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넌 정말 조종 당하기 쉬운 사람이야.
내가?
마음 속 버튼 몇 가지만 잘 누르면 생각이 휙휙 바뀌잖아.
그럼, 나 좀 지금바꿔봐. 조종 좀 해달라고.
난 못해. 넌 조종하기 너무 어려운 사람인 걸.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조종하기 쉬운데 어렵다니.



언젠가 Astin에게 삶이 힘겨웠던 적이 있냐고 물었고 그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

"힘들었던 적이 없다고 쉬운 삶을 산 건 아니야. 항상 어려워서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은 거 뿐이지. 내 삶의 난이도는 언제나 높았어. 물론 나만 힘든 삶을 사는 건 아니겠지만."

그냥 이대로 살까?
이대로 사는 게 뭔데? 이대로 사는 건 변화도 성장도 없는 거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8월 마지막날, M을 만나기로 했다. 여름에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반가웠지만 다소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M을 만나러 갔다. 가는 길 내내 비가 내렸다. 혼자 그의 반응을 상상했을 때는 조금 두려웠다. 말하지 말까란 고민까지 들 지경이었다. 이건 아무리 M이라도 미쳤다고 할 거야.

M이 해준 카레를 먹고, 어머니가 해주신 멸치볶음을 먹으며 밀린 이야기를 하나씩 시작했다.


H야, 그건 네가 마음을 너무 한 번에 줘서 그래.
그렇지만 난 그렇게밖에 못해. 다른 방법을 모르는 걸.
근데 그럴 거면 상처는 감내해야해. 어쩔 수 없어.


M, 난 너무 지독하게 관계지향적인 인간이야. 내게 사건은 하나도 중요치 않아. 그리고 의도와 의지는 내게 전부이지.

그래도 화내면 안 돼. 의심스럽거나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면 욱하지 말고 확인해봐야 해. 지금 그 말이 내겐 이렇게 들려서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그런 의도가 맞냐고. 아마 보통은 아닐거야. 그런데 정말 네 생각이 맞다면 그때는 그 사람을 인정해줘야해. 아 우리가 그 정도 사이구나 하고.

요새 나의 관계 키워드는 여유야. 지켜보고 기다리고 인정하는 거지.


좋지 그건... 나도 그랬던 적 있거든. 그런데 잘 생각해봐야해. 그건 결국 내 마음 편하고자 하는 위안일 뿐이잖아.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봐야 해. 만약 미안하다면 그걸 감내해야하는 건 또 나지. 난 너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고 봐. 그가 원하지 않으면 넌 그걸 요구할 권리가 없는 거야.

그런데 이유는 말할 수 없는데 이상하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없었어. 그냥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네. 기다리는 것 말고는. 언제나 그랬듯이 알게 될거야. 단순하게 생각하자.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M은 역시 M이였다. 온통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듣는다. 하지만 그런 M조차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내게 물었다.

-H야, 넌 그들이 왜 좋아?

-...글쎄...이유가 있나. 널 좋아하듯이 똑같이 좋아하는 것 뿐이지.

나답지 않게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엄청난 양의 비바람이 몰아쳤다. 홀가분했던 마음은 혼자가 되니 정리된 줄 알았던 모든 생각이 뒤엉켜서 나를 덥쳐왔다.

마음의 평온이 필요해.

M도 나도 제 1의 목표는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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