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1 이번 설은 나만 서울에 남게 되었다. 아빠가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본가에는 동생과 엄마가, 아빠는 본가 근처 병원에, 나는 서울에 있는 기묘한 명절을 보내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아빠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원래 계획이었던 부모님의 상경이 무산된 탓이지만, 별다른 군소리 없이 나를 혼자 서울에 있게 해준 것으로 오히려 함께할 때보다 더 크게 가족의 사랑을 느끼고 있다.
2 요 며칠은 끼니를 때우는 음식점이 문을 닫아 하루의 기틀이 마구 흔들렸다. 1월은 식사 시간을 고정해두고 그 중심으로 하루를 보내곤 했는데, 그 틀이 무너진 덕에 나도 덩달아 휴일처럼 하루를 보내고 있다. 뉴스나 기사를 전혀 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지만, 이런 몸에 맞닿는 일들로 명절을 실감한다. 이번 설은 한 발짝 바깥에 서서 세상을 지켜보는 기분이 든다.
3 휴일이 주는 나른함 때문인지 귀찮지만 꼬박꼬박해오던 일들을 미뤄보았다. 너무 귀찮던 바디 로션 바르는 일이라던가, 가습기의 물때를 제거하고 하루 두 번 물을 채워놓는 일, 화분을 해 드는 시간에 맞춰 창가에 놓는 일 같은 것이었다. 사소한 것들이었는데도 하나하나 미루기 시작하니 방 한 칸이 엉망이 됐다. 바닥에는 옷이 뒤엉켜 뭉쳐있고, 먹다 남은 포장 음식이 책상 가운데에 올려져 있기도 했다.
4 어제는 가볍게 삼청동을 산책하며 좋아하는 빵집에서 햄치즈 크로와상을 사 왔다. 11시에 하는 점심 식사를 빵으로 대체할 셈이었다. 이 집 빵을 무척 좋아하지만 군것질을 줄이면서 자주 먹지 못했는데, 휴일인 김에 빵으로 한 끼를 때울까 싶어 햄과 치즈와 할라피뇨가 들어간 크로와상을 사 왔다. 오늘은 이 빵을 먹을 생각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아메리카노랑 먹을지 초코 우유와 먹을지를 넷플릭스 보며 한참 고민했다. 숙소 근처 편의점이 닫아 도보 5분 거리의 편의점에 들러 초코 우유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 커피도 함께 사 왔다.
5 커피를 먼저 한 입 먹고, 크로와상을 와구 베어 먹었다. 느끼한 크림치즈가 마구 입안으로 들어왔다.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고, 입맛을 해칠 걸 알면서도 초코 우유를 열어 우유도 한 입 먹었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묵직한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그것마저도 나의 의지라는 생각에 행복했다. 빵 하나로 느낄 수 있는 이 행복.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몸으로 솟구치는 살아있음의 행복과 생동감을 고스란히 느꼈다.
6 크로와상을 만끽하며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또 생각했다. 갓 만들어진 따뜻한 빵이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위로를 주는 단순한 내용인데, 나는 이 소설을 카버의 대표작인 대성당보다도 훨씬 더 좋아한다. 소설 속 빵이 크로와상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소설을 계기로 크로와상을 좋아하게 됐다. 이 빵집은 11시 오픈이라 따뜻한 크로와상-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 아쉽다. 물론 11시에 가도 따뜻한 크로와상을 맛볼 수는 있지만, 소설 속 크로와상은 왠지 새벽에 가까운 이른 오전에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7 돌림 노래처럼 레이먼드 카버의 책을 차례로 빌려오고 있다. 이제는 웬만한 작품을 다 읽었는데도, 그의 책을 읽으면 또 다른 그의 글이 읽고 싶어져 읽은 지 오래된 순서로 책을 빌려오게 된다. 크로와상을 먹으면서 이 소설이 수록된 책 <대성당>을 또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그 책을 빌려와 '대성당'을 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8 이제 슬슬 혼자 보내는 시간이 지겹고 따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누군갈 만나볼까 하면 그것은 더럭 겁이 나고 지옥처럼 두렵게 느껴진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도대체 무엇인지. 혼자 이렇게 틀어박혀 책 읽고 놀며 시간을 나른하게 보내는 일인지, 치열하게 부딪히며 뭔가를 성취하고 만들어내는 것일지. 지금의 삶이 좋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9 내가 무언가를 표현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느껴지는 것을 혼자 만끽하면 되는지,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지, 가능한 한 몸을 숨겨야 하는지. 그 중간이 좋지 않겠냐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게 내 문제일까? 나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은 욕망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싸운다.
10 그렇지만 혼자 보내는 고요한 아침, 갓 만든 따뜻한 빵, 잊고 있던 무언가가 그리워지는 음악, 마음으로 스며드는 책, 죽음의 맛이 나는 커피, 조용히 무성해지는 나의 식물들과 노트북만 있다면 어디서든, 누구와 함께하든(아직 이것은 확신하기 힘들지만) 그럭저럭 기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