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의 고요한 우아함

in #kr4 years ago (edited)

1 오늘은 이 플레이리스트를 들었다. 더는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듣지 않지만 제목과 썸네일을 보자마자 클릭하게 됐다. 5초쯤 들으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음악은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로 사람을 데려간다. 그 세계는 과학이나 마법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 같다. 분명 자신에게 숨어있지만, 자각하지 못했던 내면의 세계로 빨려간다. 주기적으로 이런 음악을 들으며 온갖 자극적인 것에 젖어있는 영혼을 정화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2 클래식 피아노를 졸업하고 잠깐, 공연 일로 바쁠 때 잠깐 레슨받았는데, 그때 배웠던 곡의 제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연습하던 곡들이 궁금해지면 어떻게든 찾아내긴 하지만, 정확한 제목을 외우는 게 아직도 어렵다. 가끔 어렵게 작품명을 찾아내도 어떤 악장인지 몰라 악보를 처음부터 살펴볼 때도 많다.

3 실용음악을 배울 때는 한 주에 한 곡 이상 진도를 나가곤 했다. 내가 배웠던 클래식은 짧게 지나가는 소품곡도 있었지만, 대부분 한 곡에 세 달 이상을 각오하고 시작해야 했다. 세 달을 연습해야 겨우 곡을 살펴볼 정도가 된다. 곡이 시작되는 처음 네 마디를 두고 한 시간 동안 레슨했던 적도 있다. 선생님은 전혀 못 알아들을 추상적인 말로 주법을 설명했고, 나는 그냥 빨리 수업이 끝나기만을 바랐었다.

4 문제의 네 마디는 라벨 곡이었는데, 처음 왼손 패턴이 곡 전체에 나오는 중요한 모티브였다. 곡을 받쳐주는 왼손 패턴과 그것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오른손 멜로디의 곡이었는데, 오른손은 살펴보지도 못한 채 왼손만 보다 레슨이 끝났다. 베이스음을 깊게 누르는 것과 그와 대비해 화성을 가볍고 균일하게 누르는 것, 같은 화성을 연달아 누르면서도 음이 최대한 떨어지지 않게 레가토로 연주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5 피아노의 특성상 같은 음을 연주할 때 건반을 떼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 간격을 최소화할 순 있다. 몇 주 뒤에 어찌저찌 선생님이 수긍하실 정도의 테크닉을 깨닫게 되었고, 그 후로는 건반이 손에서 떨어질 듯 말 듯 한 찰나에 바로 다음 음을 누르는 그 연주를 즐기게 되었다.

6 오늘은 캡틴 아메리카를 봤는데, 보던 중간에 잠깐 책상에 앉았다. 역시나 그 찰나에 창문에 햇빛이 들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별개인지 어떤 멜로디가 떠올랐다. 솔라시도레미레파솔라였는데, 자꾸 흥얼거리게 돼 역시 오랜만에 키보드를 켜 음을 쳐봤다. 내가 부른 음에 임시표가 섞여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시하고 솔라시도레미레파솔라로 악보를 그렸다. 그리고는 뒤에 두 마디를 더 만들어 그린 채 내가 좋아하는 코드를 붙였다.

7 캡틴 아메리카를 다 본 후에야 내가 떠올린 멜로디가 스타 트렉 엔딩 크레딧의 일부였다는 걸 깨달았다. 원곡을 다시 들어보니 정확한 멜로디는 솔라시b도레미b레파솔라였다. 코드 진행도 훨씬 더 멋졌다. 원곡과 내가 짠 네 마디 진행을 계속 비교해서 들었다. 원곡도 정확하게 카피하지 않아 엉성한 부분이 있었다. 깊게 빠져들려다 각자의 장점이 있다-고 가볍게 넘겼다.

8 지난 한 달간 꾸준히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공연을 하게 되면 어떨까? 그걸 내가 원할까? 원한다고 할 수 있을까? 피아니스트로 서는 무대를 그리워하는 것도 같고, 두려워하는 것도 같았다. 오늘은 클래식 피아노를 다시 배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공연을 앞두고 너무 불안해 선생님을 찾아갈 수밖에 없던 날들이 떠올랐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조급하진 않다. 다만 늦어도 좋으니 언제가 됐든 그때가 다시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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