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휘 의 일생

in #zzan7 years ago

1986년 6월 12일 선우휘 사망

일제 강점기와 그 뒤를 이은 한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평안도 출신 인사들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별로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서북 출신 인사들이 파벌을 구성할 정도로 많았고, 대충만 꼽아 보아도 도산 안창호, 춘원 이광수,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장준하, 함석헌 등이 죄다 평안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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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을 돌이켜 보면 의 내각수반인 장면 총리를 비롯하여 각료의 태반이 평안도 사람이었고 학술원의 초대 회원 51명 중 최소한 13명이 평안도 출신이다. 그 평안도 출신 인사들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을 주목해 본다. 선우휘가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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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평북 정주 출신이었다.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와 벌이는 일을 보고 치를 떨며 월남했던 ‘삼팔따라지’였던 그는 동향의 사장 방응모가 운영하는 조선일보 기자를 잠깐 하다가 군에 입대, 정훈장교로 활약하며 대령으로 제대한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예술가 타입의 인물이라 “막걸리 대령”으로 이름이 높았고 원치 않는 명령 앞에서는 술 취한 척 쓰러져 개기기도 했다는 그는 전역 이전 소설가로 등단했고 이후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언론인 생활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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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전 장관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리버럴 우파’였다. 동년배였던 경상도 출신의 이병주를 ‘리버럴 좌파’라 했으니 그에 조응되는 표현일 것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진보파, 이병주의 ‘지리산’은 리버럴 좌파, 선우휘의 ‘불꽃’, ‘깃빨없는 기수’는 리버럴 우파, 이문열의 ‘영웅시대’는 보수파.” 리버럴 우파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한 듯 싶다.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의 하는 양을 보고 미련없이 남하했던 그는 매우 리버럴했지만 ‘우익’으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고 말년으로 가면 우익의 정체성이 리버럴의 그것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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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이나 그의 장편 <노다지>를 보면 해방 공간의 우익에 대해서도 그다지 호감이 없고,피바람을 일으키고 다녔던 그의 고향 청년들의 조직, 서북 청년단은 혐오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생각 하나는 명확했다. 제 아무리 우익이 삽질을 해도 북한을 비롯한 좌익보다는 낫다는 일종의 도그마. "휴전선 이북의 김일성 도당이 있는 한 반공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은 그의 일생을 관철한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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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적은 동지가 되는 법, 그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서 월남전 관련 기사를 빌미로 외신부장 이영희를 몰아내고, 이후 유신과 5공에마저 눈을 감는‘오른쪽’ 인사가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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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유신치하 언론인들의 자유 수호 투쟁 당시 그가 보여준 행동이다. 그는 해직기자측의 변호사가 벌이는 증인 심문에서 이렇게 대답하여 변호사의 입을 벌어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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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자유실천을 위해 기자협회 분회의 회보를 발간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문제작을 하는 일도 벅찬데 그런 것까지 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입니다 ”
“언론이 병들어 빈사상태에 놓여도 모든 것을 사장에게 맡기고 가만 있어야 합니까?”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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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그는 오갈데 없는 ‘수구꼴통’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폄하하고 끝내기에는 껄적지근한 점이 많다. 그는 북한을 의식하여 독재 정권을 용납하긴 했으나 그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않았고 그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일에는 반대의 목소리를 분명히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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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론사상 처음으로 정권에 의해 구속된 편집국장이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때 그는 사건 다음 날 애국적 견지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왔다는 5명의 청년들에게 자수하여 전모를 밝히라고 요구를 했고 이것이 무망하게 돼 가자 9월 7일 돌아가는 윤전기를 세운 뒤 기습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담은 사설을 끼워 넣는다.

“......생각할수록 김대중사건은 그와 전혀 무관한 절대 다수의 국민에게는 어이없고 견딜 수 없는 횡액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머지 사건을 격발하였다고 볼 수 있는 김대중씨의 그간의 해외정치활동을 들추려는 사람도 없지 않으나, 아직 그러기에는 氏가 당한 액운이 너무나 처절하며 그 입장이 몹시도 처량하다. 이번 사건으로 건국 4반세기를 넘긴 이제와서 남에게서 민주주의 강의를 들어야 하는 것도 생각하면 기가 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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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햇곡으로 떡을 빚어 조상의 영전에 바쳐야 하는 이 국민의 가슴에 젖어드는 불안은 무슨 까닭이며, 왜 죄없는 착한 국민은 이다지도 가슴을 죄어야 하는가. 신이여! 이 국민에 용서와 축복을! (1973년 9월 7일 조선일보 사설)

이 사설을 쓰고 그는 사직서를 사장 책상에 올려 두고 잠적했는데 이 사설의 최초 독자는 다름아닌 백기완이었다. 자주 어울려 술을 나누던 사이였던 그에게 선우휘는 이렇게 말한다. “단편소설 하나를 썼어, 썼는데 형식은 신문 사설이야.” 지명관이 TK생이라는 필명으로 독재 정권 하의 한국 현실을 폭로하는 원고를 일본으로 보냈을 때 그 전모를 다 알고도 죽을 때가지 입을 다문 것 또한 선우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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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들을 “역사의 교훈을 모르는 덜 떨어진 지진아(遲進兒)”로 매도한 그였으나 김지하가 인혁당 사건으로, 임헌영이 남민전 사건으로 중형을 받게 되자 선우휘는 ‘이들이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아닌 것’이라며,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쓰고 이들의 석방을 주장하는 칼럼까지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석방된 임헌영이 인사차 찾아갔을 때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권하면서, 시대의 광기를 예고한 듯한 이 소설을 읽고도 좌익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대책이 없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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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뛰어난 작가이자 언론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야 할 일에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이 옳다고 믿어 왔던 ‘진영논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고 그 진영이 쌓은 성벽 위의 총구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았으며 그 성벽이 때로는 장벽과 질곡이 되고 있음을 인정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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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생문제에 관해 아예 입을 다물기로 작정한 데는 내 나름의 까닭이 있다. 나로서는 입을 열면 신랄하게 비판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그런 학생들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똑같은 강도로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가 불가능하니 다른 하나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공정한 비판의 논리라는 것이다.”고 정치 권력의 전횡을 비판하지만 ‘학생 문제’에 참지 못하고 툭하면 날 선 필봉을 휘둘러 댔던 그의 글들은 결과적으로 “학생들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정치권력”을 돕는 결과로 귀착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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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이 회상하는 선우휘의 마지막 날이다. “1986년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어느 날 꿈속에 선우 선생을 만났어. 하얀 저고리 입은 그 양반을 명동 한 복판에서 만난 거야. 내가 ‘아, 영감 여기서 이러면 어떡 하우’라고 하자, 선우 선생은 ‘소주 한잔 하자’는 거야. 그러곤 꿈에서 깼어. 다음날 아침 문병 온 사람이 알려줬어. 선우 선생이 돌아가셨다고….” 선우휘는 KBS의 6.25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각지의 전장(戰場)을 답사하느라 발품을 팔다가 돌연 세상을 등졌다. 마지막 날까지도 그는 그의 진영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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