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콜린스의 죽음

in #zzan7 years ago

1922년 8월 22일 마이클 콜린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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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정서를 가진 나라가 아일랜드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가 보지는 않았지만 능히 그럴 것이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워낙 그 역사의 굴곡이 우리와 비슷하고 우리가 겪은 일들을 겪었으며 우리가 당한 꼴을 비슷하게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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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왕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공격한 이래 근 800년 동안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손에서 놓여난 적이 거의 없었다. 잉글랜드 지주들은 아일랜드 소작농들을 잔인하게 짓밟았고 19세기 감자 대기근 때에는 근 백만 명의 국민들이 굶어죽었다. 영국은 그 참상을 외면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등잔 밑은 그렇게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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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식민지와 다른 나라의 통치를 받고 있는 나라는 수도 없이 많다. 또한 가난한 나라도 많다. 그 나라에는 거지들이 득실거린다. 그러나 한명도 빠짐없이 전 국민이 거지들인 나라는 아일랜드밖에 없을 것이다.” 한 영국인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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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접어들면서 아일랜드에는 새로운 기운이 땅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 주목할만한 것이 1916년의 부활절 봉기였다. 그렇게 시기는 좋지 않았다. 1차대전이 한창이었고 아일랜드인들도 수만 명 영국군의 일원으로 유럽 전쟁에 참전 중이었다. 이 와중에 아일랜드 독립을 외치는 IRA는 반영 봉기를 계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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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아침 시내 중심가에서 서른 여섯의 패트릭 피어스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소리높여 외친다. 오등은 자에 아 아일랜드의 독립국임과 아일랜드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처음에는 그저 그랬다. 쟤 뭐하는 거냐 시민들은 격동하여 일어서기는 커녕 멀뚱멀뚱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패트릭의 동료들이 시내 중심가를 장악하면서 사태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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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이던 영국은 자기네 안방에서 일어난 화재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그들은 아일랜드인들이 점거한 중앙우체국에 함포 사격을 퍼부었고 계엄을 펴서 봉기 가담자들을 잡아들였다. 영국은 이들을 ‘시범 케이스’로 여겼다. 아예 맛을 보여 줄 것이면 화끈하게 보여 주자는 것이었다. 벌금이나 몇 푼 내고 징역 좀 살면 풀려나리라 생각했던 봉기자들은 느닷없는 사형 선고에 경악한다. 이윽고 영국은 주동자 15명을 총살시켜 버린다. 이 강경책은 뜻밖의 결과를 가져온다. 버나드 쇼의 말처럼 “죄수들은 성인이 되어” 버렸고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는 뜨겁게 불타올랐다. 처칠이 말한 바 “싸움터의 잔디는 빨리 자라지만 처형대 아래 잔디는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였다. 아일랜드인들은 반영 투쟁에 떨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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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등장한 것이 마이클 콜린즈였다. 그는 부활절 봉기에도 참가했지만 천행으로 사형을 면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계 최강 영국과 싸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정면 충돌로는 계란과 항공모함의 대결인 걸 알고 있었던 그는 소규모 게릴라전과 테러 전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영국을 충격과 공포로 밀어넣었다. 영국 경찰이 더블린 시내를 순찰하다가 황천길을 가는 일이 수시로 일어났고 어디에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은 용맹한 대영제국 군인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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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견딜 수 없게 된 영국이 협상을 제안해 왔다. 아일랜드 국민의회의 대통령 에이몽 드 발레라는 콜린스를 협상 대표로 보낸다.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안나오는데 대통령인 내가 나갈 수는 없다.”

이 회담에서 마이클 콜린스는 일부 아일랜드인을 경악시키는 합의에 서명한다. 북부 얼스터 주를 제외한 아일랜드 영토에서 영국군을 철수하기는 하지만, 아일랜드는 대영제국 내 자치령으로 남고 “영국 정부와 국왕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조건에 합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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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스 스스로 나는 “사형 집행장에 서명했다.”고 말하거니와 과격파 아일랜드인에게는 피가 거꾸로 솟는 조건이었다. 아일랜드 국민의회의 대표이기는 했지만 미국 시민으로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대통령 발레라도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는 이 합의를 거부하고 사임한다. 그리고 아일랜드는 격렬한 내전에 휩싸여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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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정부의 지명수배자 가운데 수위급이었던 콜린스, 목숨을 걸고 폭탄을 터뜨리고 총을 쏘며 영국 군경의 뒤통수를 쳤던 콜린스가 그 조약에 좋아서 서명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이 협상을 요구해 온 순간 아일랜드의 독립운동 세력도 힘을 소진한 상태였고 어떻게든 다음 행동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이 콜린스의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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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즉시 완전 독립에 영국군 타도를 부르짖는 이들에게는 콜린스는 오갈데없는 ‘콜라보’였고 영국에 투항한 ‘악질 친영파’가 돼 버렸다. 그는 결국 1922년 8월 22일 한때 열렬한 동지들이었으며 협상 이후 반대파가 된 IRA 조직원들의 매복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둔다. 이후 발레라는 아일랜드 독립 후 다시 대통령이 돼 아일랜드를 다스리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콜린스가 옳았고 내 식견이 짧았음을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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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콜린스는 갓 서른 삶을 불꽃처럼 살다가 죽었다. 한때 그 불꽃을 감추려 했지만 더 큰 불꽃을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아예 꺼져 버렸다. 누가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은 각자의 몫일 게다. 지금도 영국령으로 남은 얼스터 지방에서는 콜린스는 나라를 팔아먹은 자로 혐오의 대상이라고도 하고 영국은 리암 니슨의 주연 영화 <마이클 콜린스> 가 개봉됐을 때 살인마를 미화한다고 볼멘 소리를 했다. 마이클 콜린스는 과연 그 말들에 어떻게 대꾸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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