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번아웃을 사랑했다 - Q. 하루, 에너지를 얼마나 소비하시나요?

in #zzan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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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을 사랑했다
Sagoda Q. 하루, 에너지를 얼마나 소비하시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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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해 보면 답이 보일 거야.
한 달마다 무조건 하나 이상의 성과를 이뤄내야 해.
그럼 성공할 거야.


몇 살 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저 마음이 다짐이 되고, 그 다짐이 인생의 모토로 자리 잡았던 때가.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가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어라, 나도 달려야 하는 건가. 그런데 어디를 보고 가지. 물음이 들자 우선 엉덩이부터 떼기로 했다. 자기소개서가 도입되고 수시 전형에는 날개가 달렸다. 다양한 활동으로 생활기록부를 채우면 아무리 내신이 낮아도 스카이에 합격할 수 있다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닥치는 대로 대학 서적을 읽었다. 꾸준한 봉사활동이 후한 점수를 받는다는 카더라의 말에 도서관에서 서가 정리도 했다. 틈틈이 관련 영화도 봤다. 굿 윌 헌팅,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교육을 기반으로 한 옳은 방향의 영화들. 생활기록부는 점점 두툼해졌다. 페이지 수가 늘어날수록 성공적인 삶에 가까워지는 듯했다.


대학에 왔다. 비록 스카이는 아니었지만, 제주도에서 나올 수는 있었으니 내가 이룬 성실이 빛을 발했다는 착각에 들떴다. 오프라인에서는 멘토가 부재했으니 항상 자기 계발서를 지니고 다녔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올바른 방향과 성실성을 강조했다. 음…… 방향은 올바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으니 우선 성실부터 갖추자 생각했다. 대부분 대학 1학년 때는 교내 활동을 중심으로 한다지만, 나는 교외 활동에 눈을 돌렸다. 지역 대학 연합동아리에 나갔고, 국토대장정을 했다. 동갑을 찾기는 어려웠다. 어린 게 착실하네. 칭찬을 받을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성실과 노력은 성공과 비례한다는 얘기가 만연했으니까. 그도 그럴 게 지인들은 "힘들지 않아?"라는 원초적 물음 대신 "대단하다", "멋지다", "부럽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지금에 와서야 그리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지만, 몇 년 전까지는 그런 것도 없었다. 퇴근 후에도 틈틈이 외국어를 공부해서 승진한 회사원과 여러 스펙을 통해 대기업에 입사한 지방대학생들의 성공담이 메인에 오르는 날들. 나는 스스로 특출 난 열정을 지녔다 여겼으니까 그들의 보폭에 발을 맞췄다. 그러다 가랑이가 찢어졌다. 대학 입학 후 1년 뒤, 심각한 번아웃이 찾아왔다.


주전공, 복수전공, 부전공까지 융합형 인간이 되기 위해 다채로운 수업을 들었고, 와중에 틈틈이 교외활동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자격증을 준비했다. 번아웃이란 것. 감기처럼 시름시름 앓는 건 줄 알았더니 어느 날 하루아침에 벌컥 방문을 열고 찾아왔다. 동기 중 가장 열정 가득하다는 찬사를 받는 내가 무기력해지다니! 라는 생각을 했고, 성공과 열정에 눈이 멀었던 나는 그다음 단계를 잘못 밟았다. 그러니까,


건강한 사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 한동안은 푹 쉬고, 이제부터라도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좀 쉬엄쉬엄 걸어가야겠다.

그때의 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 와,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번아웃까지 와? 나 자신 역시 대단하다. 칭찬한다.


무기력증에 신이 난 나는 당연히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 일주일간 모든 일을 미루고 놀았다. 일주일을 탱자탱자 놀았으니 그만큼의 일이 쌓였다. 더 놀고 싶었지만 기간은 7일로 정해뒀으니까. 밀린 양의 과제를 모두 해치우기 위해 하루 두배 이상의 일을 해냈다. 그럼 또 몇 주 뒤 번아웃이 왔다. 그럼 또 그만큼 열심히 살았던 나를 칭찬하며 번아웃을 즐겼다. 살도 한동안 쭉쭉 빠지다가 잠깐 정체기가 오고, 그 정체기가 지나면 또 훅 빠지는 것처럼. 나는 번아웃을 다이어트 정체기로 취급했다. 성장의 원동력, 그 이름은 - 번아웃.





"요즘 중간고사 기간이라 참 바쁘죠?"


심리상담 선생님이 안부차 인사를 건넸다. "네? 아니요. 저 요즘 번아웃 와가지구 못하고 있어요. 한 이틀만 더 쉬고 바로 밤새려고요!" 선생님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번아웃이요?" 나는 아주 깜찍하게 "넹." 이라 답했다. "요아 씨." 엄숙해진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내가 무얼 잘못한 건지 되짚으며 머리를 굴렸다.


"인생이 1년, 2년 만에 끝나는 게 아니라 길게 천천히 걸어가는 길이잖아요. 소진이 될 만큼 체력과 정신력을 쏟았다가 번아웃이 오고, 그 번아웃이 지나가면 또다시 몸과 마음을 소진한다는 건 결국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번아웃을 초래할 거예요. 건강한 사람은 번아웃이 오지 않도록 하루의 나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거든요."


두툼한 생활기록부처럼 번아웃을 통해 그간의 노력을 점검했었는데, 그게 건강하지 않은 방법이라는 걸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번아웃이 왔을 때보다 두 번째, 열 번째 다가왔던 번아웃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웠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더욱 무거워진 몸을 껴안고, 점점 깊어지는 고민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의 우울한 깊이들. 핫라인에 전화를 걸고, 모두가 통화 중이라는 연결음에 젤리 한 움큼을 사 와 입에 욱여넣었던 번아웃 시기.





그날 방에 돌아와 일기장을 폈다. 에너지의 3분의 2만 쓰자. 나머지 3분의 1은 다음날로 미루자. 일을 하다 보면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고 그냥 확 끝내고 다음날은 편히 쉬겠다고 다짐했던 내 습관을 최소 한 달은 바꿔보자 다짐했다. 지금 샷 세 개 추가한 아메리카노 마시면 새벽 4시까지는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며 카페인을 벌컥벌컥 수혈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오늘은 여기까지면 됐어. 그다음은 내일 하지 뭐. 라는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대했다. 하루 쏟을 할당량 이상의 에너지를 쓰지 않으니 자연스레 일 외적인 취미 생활에 눈이 돌아갔다. 예전 같으면 무슨 영화야, 무슨 연극이야. 그거 할 바에 이거 다 끝내는 게 낫지. 했을 텐데.


전기 요금료 나오듯 정기적으로 찾아왔던 번아웃이 일 년간 발길을 끊었다. 기쁘다. 하나 이상의 성과를 한 달 내로 억지로 이루지 않더라도, 인생 기니까! 라며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모습이 좋다. 맨날 자소서도 떨어지지만 탈락의 슬픔에 쏟을 에너지는 요기까지만, 하며 정리하는 내 모습도 새롭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지금 1차 서류도 떨어졌는데 네가 친구 만날 때야? 하면서 혀를 찰 테지.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야말로 그렇게 걱정 다 껴안고 밤새면 골병나. 아주우 크게.


sagoda Q.

사람마다 각기 다른 그릇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개개인이 쏟을 수 있는 에너지도 정말 다양할 것 같아요.
사고다/스티미언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의 에너지 충전기를 가지고 계신가요!
만약 방전된다면 어떻게 회복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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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일때는 번아웃도 마음대로 찾아올 수 있지만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책임감때문에 그러기도 쉽지 않지요.

결혼 하고 22년 나를 몰아붙이며 살았더니 애 둘 대학 보내고
딱! 테이프가 끊기듯이 번아웃 되어 버렸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8개월...
동굴안에 있었더니 이제야 좀 정신이 드네요.

전 혼자 있어야 에너지가 충전되는 스타일이라
혼자 있었어요.

이젠 쉬엄 쉬엄 살아보려구요.

젊을 때는 치열하게 살아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쉬면서 느긋하게 사는 건 언제라도 할수 있지만
치열하게 사는 건 젊을 때 아니면 힘들듯요^^
(젊어서 치열하게 살지 않은 사람이 나이 들어 그렇게 못살겠죠. 그 사람은 그럼 치열한 삶은 살아보지 못하는 거.)

감히 부양의 책임감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ㅠ_ㅠ
8개월 간이 럭키님에게 있어 커다란 충전기가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치열하고 느긋하게 살아가보도록 (정말 어렵겠으나) 하려고요.
젊어서 치열하게 살지 않은 사람은 이후로도 그렇게 살기는 어렵다는 말이 인상 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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