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이달의 작가 응모작, 소설 「백색소음」

in #zzan5 years ago (edited)


제4회 zzan 이달의 작가 공모전, 소설 부문




백색소음


@hyunyoa

    새벽부터 쏟아진 비 탓에 그는 일정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동거인은 해외여행이 처음이었고, 다시 한국 밖으로 나올 날은 먼 미래라고 여겼으므로 그는 동거인을 설득할 수 없었다. 트레비 분수라거나 콜로세움 같은 명소들이 모두 밖에 있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동거인은 이러다 죽을지도 몰라. 라는 위협을 느끼지 않는 한 모든 일정을 소화하자고 익살스럽게 말했다. 그는 평소 비를 싫어했지만 그 천진함에 우산을 챙겼다.

    현지서 급하게 설치했던 날씨 앱은 그들이 저녁을 먹을 때까지 흐릴 거라고 예보했다. 한국의 기상청이 아니었으니 그들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축축한 발을 견디며 도착한 나보나 광장은 음침했다. 아이의 웃음이라거나 백발노인의 색소폰 연주 대신 가느다란 용접 소리가 들렸다. 동거인은 태연히 카메라를 꺼내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걸 왜 찍어? 그가 묻자 동거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도 휴대폰을 켜고 몇 장을 찍었다.



    다음 코스였던 콜로세움에는 동거인과 같은 사람이 많았다. 날씨에 개의치 않고 모든 일정을 소화하는 이들. 그 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리 표를 사뒀지만 줄을 서야 했다. 공무원들과 여행사 소속의 직원이 비슷한 조끼를 입고 사람들을 통솔했다. 그와 그의 동거인도 떠밀려 줄에 들어섰다. 한 무리의 중국인이 그들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대화를 멈추고 상황을 파악했다. 추가 비용만 내면 맨 앞줄로 옮겨주겠다는 직원의 거짓말에 속아 두 배의 푯값을 낸 듯 보였다. 그중 유독 분노한 중국인 한 명이 흑인의 손을 낚아챘다.

ㅡ하여튼 짱깨새끼들은.

    동거인이 무리에게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동거인의 팔꿈치를 약하게 때렸다. 그가 덧붙였다. 어차피 못 알아들어.
    소란스러운 틈을 타 동거인이 자연스레 그들 앞쪽으로 걸었다. 그들을 따라 뒤에 선 사람들도 조금씩 움직였다. 짐 검사를 마치고 들어선 콜로세움은 외관과 다를 게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입장료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고, 이토록 유명한 이유가 궁금했다. 곧 콜로세움에 관해 얕은 지식이 생긴 그는 휴대폰을 보며 얘기했다.

ㅡ여기, 귀족들이 노예들끼리 죽이도록 한 다음에 구경했던 곳이래. 여기서 사진 찍는 건 좀 아이러니하다. 그치?

    그가 옆을 보자 사람들이 우산을 접고 있었다. 구름이 걷히고 햇볕이 들었다. 여행객들이 선글라스를 쓰며 가족이나 연인을 불렀다. 동거인도 그를 재촉했다. 이 진지충아, 입장료 안 아깝냐. 사람들 모이기 전에 빨리 와. 동거인이 급하게 카메라를 꺼냈다. 그런가, 그가 액정을 끄고 포즈를 취했다. 비가 그친 탓에 사람들이 밀려들어 그들은 저녁을 한 시간 당기기로 했다. 목적지는 한국인이라면 꼭 가야 하는 음식점으로 지정된 식당. 지하철 두 정거장 정도면 도착할 만큼 가까웠지만 옷도 말릴 겸 걷기로 했다.


    그들이 나오자 호객꾼들이 달려들었다. 신경질적으로 거부하며 도착한 라자냐 집은 협소했다. 이곳저곳에서 한국어가 들렸다. 그는 꼭 먹어야겠냐고 물었다. 동거인은 당연하지. 여기까지 와서, 라고 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백인이 그의 어깨를 세게 부딪치곤 무어라 읊조렸기 때문이었다. 둘은 그에 관해 장황히 얘기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여행이 끝날 무렵 기분 나쁜 일에 연연하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 무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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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으니 로마갔을때 생각나네요. ㅋㅋ 진짜 사람 많고 진빠지고 복잡하고 소매치기당하는거 아니냐고 가방을 꼭 움켜지고 다니던 그 기분이 떠올랐어요. ㅎㅎㅎ

써니님! 뒤늦게 답글을 다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역시 이탈리아에서 특히 그랬죠 ㅠㅠㅠ 그때의 기분이 드신다니 쓰는 이로서 감사할 따름이네요. 이젠 휴대폰 줄없이 한국을 돌아다닐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계속 이어지나요? 역시 작가님이네요.

초단편이라 저렇게 완결하기는 했는데, 이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감사합니다!

뭐랄까 정말 타의적인 여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자신이 계획하고 갈지언정 결국 가는 곳은 남들 다 가는 곳에, 남들 보여줄 사진을 찍고, 한국인이라면 가는 식당을 간다니 결국 여행이라기보다는 성지순례하듯 가는 곳만 도는 느낌입니다.

제가 글을 읽으며 느낀 무력감 비슷한 느낌과 글을 쓰면서 생각하신 무력감이 같은 느낌일지는 모르겠으나 저런 여행을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말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기 위한 여행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저는 그냥 여행가면 그 지역 음식 먹으면서 푹 쉬는 걸 좋아하는데 말이죠.

다시 생각해보면 비싼 돈으로 먼 곳에 여행가는거니 확실한 곳만 가려는 게 최선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먼 곳을 못가나보네요ㅎㅎ

최고의 독자 @ksc님......b 제가 담고자 하는걸 너무 잘 꿰뚫어보셔서 당황스럽습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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