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작가-수필] 아빠, 천천히 가도 괜찮아

in #zzan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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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형적인 한국 사람이라 ‘빨리빨리’에 익숙해져 있었다. 뭐든지 빨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고 그게 옳다고 여겨왔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빨리 걷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아이들과 함께 걷는 것이 그렇게도 답답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그래서 늘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천천히 걷는 아이에게 빨리 걸으라고 재촉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는 순간까지 늘 빨리빨리를 외쳤다. “빨리 일어나, 빨리 준비해, 빨리 밥 먹어, 빨리 자, 빨리...... 빨리......” 어느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을 만도 하지만 아이는 쉽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빨리빨리를 외치는 내게 아이가 말했다.

“아빠, 천천히 가도 괜찮아.”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의 의미를. 그래서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하라고 다그쳤다.
며칠 후 아이들이 너무 빨리 큰다는 아내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마냥 아기처럼 느꼈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훌쩍 자라 있었다. 옹알옹알 말도 잘하지 못하던 녀석이 이제는 나와 말싸움을 할 정도로 성장했으니 말 다했다. 크면 큰대로 대견스럽고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너무 아쉬웠다.

‘왜 이렇게 빨리 크는 건지. 조금 천천히 자라도 되는데......’

처음으로 빨리빨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 순간이었다. 마침 가족과 보내는 시간 부족과 회사 일로 심신이 지쳐있는 상황이어서 아내와 상의 후 육아휴직을 결정했다. 휴직하고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조금씩 여유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혼자 산책을 하다가 이전에 아이가 “천천히 가도 괜찮아.”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1년이라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천천히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나는 동안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첫 번째는 “관심”이다. 지금껏 빠르게 지나쳐왔던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가족들과 매번 산책하던 공원도 관심을 가지고 보니 얼마나 다양한 꽃이 피는지, 얼마나 많은 오리가 머물다 가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놀이를 좋아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사람으로 자라고 있는지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나 자신에 관한 관심 역시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관심을 가지다 보니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아주 느리지만 분명히 이전과 다르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것을 느낀다.

두 번째 변화는 “진심”이다. 나와 가족, 그리고 주변에 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단순히 시간에만 집중했었다. 성장한다는 건 함께하는 시간에 비례하여 자연스레 증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아이가 심하게 아프고 난 후에 진심 없이는 앞으로 더 큰 발전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흔히 아이가 아프면 관심을 가지고 아이의 상태를 확인한다. 병원에 데려가거나 약을 먹이고 정성을 다해 돌봐준다. 그래도 쉬이 나아지지 않으면 아이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든다. 이게 바로 진심이다.

어느 대상에게나 관심을 가지고 진심으로 대하면 긍정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분명 상대방도 그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변화지만 우리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드는 씨앗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과 7개월이라는 시간을 지냈을 뿐인데도 이 정도로 성장했다면 앞으로 5년, 10년 뒤에는 얼마나 더 성장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게 될지 벌써 기대된다. 하지만 조금 천천히 가고 싶다. 지금 느끼는 즐거움을 조금 더 오랫동안 즐기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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