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zan-event] 윤점례 여사

in #zzan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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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점례 여사

십여 년 전, 우리도 드디어 땅 한 뙈기 샀다고 신난 집사람을 따라 처음 그 곳에 갔을 때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이탈리아 반도 장화 모양은 접어두더라도 비가 오면 언덕배기부터 물에 쓸려 내닫을 경사였기 때문이다. 넓디넓은 천수만 간척지를 바라보는 절대농지라 땅값 오를 일도 없는 참, 쓸데없는 투자였지만 집사람의 성격을 아는지라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동네에 농가가 드물어 귀농인들이 겪는다는 텃세 치레는 안 해도 되겠다고 속으로 위로를 삼았다.

그러나 그건 아직 모르는 소리였다. 밭 위쪽 언덕배기에 집이 한 채 있었는데 할머니라고 하기엔 꼿꼿했고 아줌마라고 하기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인이 홀로 살고 있었다. 어느 해 추석엔가 귀엽게 생긴 여자 아이가 그녀의 꽁무니를 따라 밭고랑을 타고 넘으며 ‘윤점례 할머니, 이건 뭐야?’ ‘윤점례 할머니, 그 강아지 어디 갔어?’, 맹랑하게 제 할머니 이름을 불러댄 이후로 우리는 그 여자를 윤여사로 칭했다. 여사는 혼자서도 농사를 척척 잘 지었는데 생강, 배추, 감자를 심어서 밭떼기로 넘겼다.
밭주인이 된지 두어 해 지난 어느 봄날 토요일, 윤점례 여사는 챙 모자도 팽개치고 달려와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동네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 점 봐유! 아니, 못 밴 사람 괄시 하는 겨? 당신네들이 뭔디 맴대루 여길 산다고 하는 겨? 면사무소 늠덜두 쳐 죽일 눔들이여. 뒷구녕으로 거래하믄 내가 모를 중 알었슈?”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지적도를 살펴보면 빌어먹을 장화의 오른편으로 시 소유의 땅 한 자락이 우리 밭으로 들어와 있다. 집사람 표현을 따르면 ‘안방에 넘의 발 하나가 쑥 들어와 있는 격’이니 우리가 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늘린다고? 맘대로 해라. 언제는 내 말 들었니.

억지춘향, 면사무소에 가서 불하 계획이 있는지 문의하니 담담 공무원이 먼저 임대하고 있는 윤점례씨가 동의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는 좀 뜸을 들이다가,

“그 아줌니가 승질이 대단혀서....”

웅얼거렸는데 잘 아는 민원인이었던 듯 했다. 그 이상 진척된 내용은 없었는데 어디선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저리 잔뜩 약이 오른 것이다. 그날, 평생 들을 욕을 다 땡겨 들었는데 요약하면 면서기와 너희가 한통속이 되어 이 땅을 나 몰래 거래하려고 하나본데 내가 여태 임대한 세월이 얼만데 까부느냐, 혼자 산다고 얕보느냐, 못 배운 사람 업수히 여기는데 우리 집안에도 판검사 있고 내 아들이 미국에서 박사 땄다.....

쏟아지는 악다구니 속에서 우리는 맹추마냥 입만 딱 벌리고 서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면사무소 직원이 여사한테 전화를 해서 이들이 땅을 사고 싶어 하는데 동의하냐고 친절히 물어봤다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 쳐도 유분수지, 여사는 분기탱천하여 도시에서 온 이 어설픈 부부에게 제대로 본때를 봬 준 것이다. 그 오해를 푸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 다음 사건은 시골 동네의 멀쩡한 도로를 가로 막고 뭔가를 공사를 하는가 싶더니 상수도 공사가 끝나 가는데 수도 안 놓겠느냐고, 웬일로 윤여사가 전화를 줬다. 개인이 상수도를 설치하면 비용이 만만치 않대서 시청 해당과에 접수하러 갔다. 헌데 이번에도 윤점례씨가 허락을 해줘야 그 집 마당에서 수도관을 딸 수 있다고 도장을 받아 오란다. 우리는 여사가 강짜가 있어서 그렇지 경우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당에 수도관 지나갔다가 문제 생기면 워치케 해유?”

결론은 안되겠단다. 그럼 왜 알려줬냐니까 그냥 알려줬다고 한다. 이건 도대체 뭐지? 사실은 마당 사용료를 요구한 건데 이 둔한 도시 사람들이 행간을 못 읽은 거였다. 이후 웬만하면 거리를 두면서 지냈다. 여사는 기분 내키면 냉커피를 타서는 우리 밭으로 내려왔는데 우리 농사에 대한 훈수를 꼭 잊지 않았다. 집사람은 눈치껏 소소한 선물 세트를 사다 주며 붙임성 있게 굴었다.

껄끄러운 감정과는 별개로 여사의 밭은 부러웠는데, 정갈함조차 느껴지는 밭의 비법은 부지런함이었다. 해 뜰 무렵에 나와서 몇 고랑을 관리하고 뜨거울 때를 피해 컴컴해질 때까지 효율적으로 일했다. 재작년에는 김장 배추를 심었다가 반은 갈아엎었고, 작년에는 어른 주먹 만 한 감자를 수 백 포대나 캤어도 품값을 못 건졌다는 말에 내 힘이 다 빠졌다. 올해는 일찌감치 마늘을 심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남쪽 지역의 수해 때문에 마늘 파종 시기를 놓쳐서 내년에는 마늘 금이 좋을 것 같다고 여사가 중요한 정보나 되는 듯 알려줬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나? 농림식품수산부와 농협은 그 빵빵한 전산망으로 이런 거 통계 안내고 뭐 하길래 저런 근거 없는 소문에 의지해 농사짓게 하는가.

아무튼 여사는 이번 마늘 파종에 중국인 노동자를 20명이나 데려왔다. 일당이 8만원이라는데 앞으로도 두 번, 멀칭 작업과 수확 때도 구해야 한다. 거기에 비닐과 농약, 밑거름 값을 치면... 여사는 새벽이든 밤이든 편히 누워있을 새가 없다. 더구나 유학 가 있는 아들이 있으니.

지난달이었다. 늘 그렇듯 고라니가 놀다 간 밭에서 무릎까지 올라온 풀을 헤치며 살아남은 곡식을 찾고 있자니 여사네 밭에 못 보던 얼굴이 등장했다. 바로 그 미국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장남이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아들을 앞세워 자랑하러 내려왔어도 진작 내려왔을 여사가 웬 일로 밭고랑에 앉아 있다. 허름한 체육복을 입은 ‘박사’는 부는 바람에 헛개비 마냥 멀리서 봐도 백면서생이다. 모친 따라 밭에 나오긴 했는데 마흔이 넘도록 몇 번 안 잡아 본 그의 삽질은 참 어설펐다.

그 다음 주말이었던 것 같다. 그 날도 장남은 밭에 나와 있었고 궁금증을 못 참은 집사람이 여사에게 슬쩍 물어본 결과 박사는 이른 바 고등 백수라고 했다. ‘강사법’이 바뀌어서 어느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도 연락이 없다고 여사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단다. 마침 마늘밭에 코팅을 하는 날이었다. 마늘 싹이 올라오기 전에 풀이 못자라게 농약을 하는 작업이다. 두 세 명의 일꾼이 왔고 기계에 연결된 기다란 호스에서 분사되는 노란색 농약이 멀리서도 보였다. 언뜻 약간의 언성이 들리나 싶더니 급기야 박사 아들은 마스크 쓴 얼굴을 깊게 수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 후론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농사에 농 짜도 모르믄서 농약 허지 말라구... 그럼 이 넓은 밭에 풀 올라오믄 지가 다 뽑을 거여?”

여사의 주름지고 검버섯 핀 얼굴이 너무나 쓸쓸해 보여 우리는 차라리 들판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황금 들판에 모여든 철새들의 수런거림이 천수만에 그득 차고 중국인 노동자들의 수다가 여사의 밭고랑에 넘치던 지난 주 토요일,

“그렇게 느려 터져서 워찌케 밥 빌어 묵고 살겨? 손꾸락을 재게 놀리란 말여.”
“알라써. 빨리 빨리.”

알아 듣거나 말거나 품꾼들을 향한 윤점례 여사의 잔소리가 들판으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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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u curate
글쓰시려다 한잔 하러 가셨나^^

어캐 아셨대유? 소주 한잔 땡기는 중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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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이 기대되는군요~
글 참 잘쓰세요~^^

과찬이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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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으면 쓸 수 없는 글인 듯합니다~ ^^

리얼이에요, 미스티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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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글을 놓쳤었네유 ㅠㅠ
이렇게 꿀잼인 수필은 처음 봤슈
이번 달에도 꼭 올려주세유~^^

ㅎㅎㅎㅎ 재밌으시다니 다행이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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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편도 기대합니다~^^

제가 감히 쓸 수 없는 경험의 깊이와 문장입니다..! 이제야 이 글을 읽은 제가 밉네요 ㅠㅠ

이탈리아 반도 장화 모양은 접어두더라도 비가 오면 언덕배기부터 물에 쓸려 내닫을 경사였기 때문이다.

허름한 체육복을 입은 ‘박사’는 부는 바람에 헛개비 마냥 멀리서 봐도 백면서생이다. 모친 따라 밭에 나오긴 했는데 마흔이 넘도록 몇 번 안 잡아 본 그의 삽질은 참 어설펐다.

짧은 서술임에도 그림을 그린듯 머릿속에 환히 장면이 떠올라요. 석박사를 밟지는 않았으나 고등 백수로서 ㅠ_ㅠ 밭을 가꾸시는 부모님이 떠오르네요. 밭에 가면 삽질은 무슨 씨 하나도 못 심을 저란 녀석..

@dozam님! 평소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신춘문예에 도전하시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왠만한 글쟁이분들보다 훨씬 필력과 표현력이 좋으신걸요.

데헷.... 과찬이세요. 아무렴 요아님 글만 하겠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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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어언혀 아닙니다..! 또 읽고 읽으려 리스팀했어요 =)

작가님이 그리 말씀해 주니 으쓱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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