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31.steemCreated with Sketch.

웨더스비 교수 씀

스탈린 트루만.jpg

이번 내용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와 관련하여 한국내 민족주의자들의 입장과 미국의 입장차이에 대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에게 한국이란 전세계 정책중 극히 일부의 작은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상황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내에서도 한국에 대한 입장이 다 다른 듯 합니다. 특히 미국무부의 입장이 결과적으로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어 갔던 측면도 부정하기 어려운 듯 합니다.

미국과 소련은 1947년 4월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여 1947년 5월 20일 공동위원회를 재개키로 했다. 그들은 1945년 12월 신탁통치 합의에 반대한 모든 정당들의 정부수립 참여를 배제하지 않도록 했으며, 이는 소련이 1946년 3월 부터 요구했던 것이었다. 대신 공동위원회의 과업에 대해 “자극적이고 선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한 어떠한 한국의 정치단체도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의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7년 봄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을 국가통합의 옹호자로 내세우고 싶어했으며. 이는 주로 독일 인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에 대한 그들의 합의는 유럽의 대중들을 대상으로한 정치무대를 지향한 것이라고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만 대통령은 정말로 새로운 합의에 대해 낙관적인 것 같았으며, 그 합의는 전 한반도를 위한 통일되고 민주적인 정부를 향한 주요한 일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미국 전쟁성 장관 로버트 패터슨은 보다 현실적이었다. 그는 소련이 실제로 한국에서 물러날 것인지 의심했으며, 지정학적으로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입장은 미국의 입장보다 강력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펜타곤의 줄어드는 예산에 의해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패터슨은 미국의 지속적인 주둔이 부족한 예산의 지출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만과 그의 새로운 국무장관 마샬은 미국의 군사력을 투입하지 않고 수용가능한 조건에서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낙관주의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신탁통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공동위 참여 자격을 상실한 한국의 우파 정치지도자들의 반응이었다. 그 전달에 이승만은 트루만 독트린 선언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트루만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서신에서. 이승만은 트루만의 “공산주의에 대한 용기있는 입장”을 환영하면서, 한국에 있는 미국의 기관들에게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간에 연합과 협조를 이루려고 하는 그들의 노력을 폐기”하도록 지시하고 요구했다. 그는, 한국이 그리스 처럼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방파제”와 같다고 하면서 트루만이 2년후에 취하게 되었던 입장을 예측하였다.
그러나 1947년 4월의 합의와 함께,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의지를 상실했다. 김구는 이러한 상황의 전개를 우려하면서 한국 임시정부를 재수립할 것이며 그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미군정장관 아처 레치는 한국 임시정부가 정치적 집회를 여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는 대한국민대표민주위원회가 미국군의 즉각적인 철수와 정치권력을 과도정부에 넘겨줄 것을 요구하도록 촉발했다. 위원회는 공동위 참여나 신탁통치에 대한 합의를 수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을 완화시키기 위해, 공동위 미측 대표인 알버트 브라운 중장은 이승만과 수차례 회동했다. 그는 이승만에게 이승만과 김구가 소련과 신탁통치에 대한 비난을 계속하면 공동위 참여를 배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항적이었다. 북한과 동유럽에서 일어난 일에 바탕하여, 그는 미국의 공동위원회 참여가 공동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질 것이며 결국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또한 미국이 신탁통치의 분명한 성격을 밝히지 않으면 남한 전체에 폭력적인 반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정확하게 예언했다.

핵심적인 문제는 한국의 지도자들이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집중하는 반면, 미국은 소련과의 전세계적 경쟁에서 자신들의 목표를 지원하기 위한 한국에 대한 정책을 수립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무부 차관보 존 힐드링은 하지 장군에게 이승만의 요구를 거부토록 지시했으며, 이는 미국이 1945년 모스크바 합의 조항의 실행을 준수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모스크바와 협상이 실패할 경우에만, 워싱톤은 남한에서 별도 정부수립을 선택할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미소공동위가 재개되었을 때 무슨일이 발생했으며 미국 정부가 이런 과정을 어떻게 봉쇄정책의 연속으로 해석하는가를 알아 보겠다.

[참고자료]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를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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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스스로가 강하지 못하면 결국 강대국의 이권에 왔다갔다 하는 형세가 된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김구선생님에 대한 내용은 여러 번 들어보고 수업 시간에도 배워서 알고 있었는데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내용은 생소합니다 새로운 사실을 오늘 또 알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의지대로 가고 있지요.

그렇지요. 그건 바뀌지 않겠지요

힘에 기반한 패권주의가 언제쯤 사라질까요?

영원히 사라지지 않겠지요

한국의 흑역사 중 하나죠.
만약 남북이 러시아랑 미국에게 신탁통치를 맡겼다면?

우리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살고 있겠지요

이승만이 이런 저런 예측은 참 잘했죠. 권력욕때문에 말아먹어서 그렇지....

인간은 신이 아니니 잘하는 점도 있고 못하는 점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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