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선셋대로(1950)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5 years ago (edited)
20세기 소년에서 '20세기의 가을'을 장식할 '20세기 영화제'가 10월부터 열린다. 앞의 문장에서 20이라는 숫자가 세 번이나 반복됐다시피 20세기 소년에게 '20'은 의미 있는 숫자다. 그래서 이번 영화제를 위해 모두 20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모두 영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작품들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선정 기준은 전적으로 20세기 소년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 어디 영화사 책에서 뽑혀져 나온 리스트가 아니라는 얘기다. 20세기에 생물학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성장을 거쳐온 '나, 최광희'라는 인물의 개인사적 목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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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장소'를 얻길 원한다. 여기서 장소는 공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내가 타인들에게 인정 받는 내 역할, 즉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확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인정 욕망'으로 연결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인정을 갈구한다. 학생들은 급우들과 선생님의 인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직장인들은 회사의 인정을 얻는 게 절실하다. 인정은 집에서는 용돈, 학교에서는 표창장, 직장에서는 승진 등의 물적 증명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인정 욕망이 과도해지면 볼썽사나운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흔히 SNS에서 보여지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전시도 그런 욕망의 일환일 것이다. 문제는 관계와 소통의 영역으로 과도한 인정 욕망이 개입될 때다. 사람들을 붙잡고 내가 얼마나 잘 나가는 사람인지, 내 주변에 얼마나 잘 나가는 사람이 많은지를 되풀이해 강조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음을 의식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렇다. 과도한 인정 욕망은 거꾸로 인정 결핍이 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결핍이 야기한 인정 욕망은 때론 강박과 집착, 타인에 대한 감정 착취로까지 이어진다. 이 영화 '선셋대로'의 노마 데스몬드처럼.

노마의 강박과 집착은 필연적이다. 그녀는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였지만 지금은 퇴물이다. 그녀가 스타였음을 입증하는 것은 잘 나가던 시절에 구입한 대저택과, 그녀 스스로 집안 곳곳을 장식해 놓은 스타 시절의 사진들이다. 이 간극은 너무 거대해서 그녀의 인정 욕망을 우주 끝까지 밀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녀의 욕망을 채워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정의 주체가 없으면 인정 받고 싶은 욕망도 늘 불발이다. 그래서 노마는 우연치 않게 찾아온 삼류 시나리오 작가 조 길리스를 자신의 시나리오를 각색해 달라는 걸 핑계로 인정의 주체로 고용한 것이다.

조에겐 노마의 예전의 화려한 명성보다 지금이 더 중요하다. 당장 압류 당할 위기에 처한 자동차도 구해야 하고 집세를 낼 돈도 필요하다. 돈이 너무 많은 이 여자가 여전히 매력적이며 여전히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게 틀림 없다고 인정하는 척만 해주면, 궁핍한 처지에 꿈도 못꾼 고급 의류에 화려한 장신구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 거래를 받아들인다. 대신 그는 오로지 노마만을 위한 끝없는 감정 노동에 갇혀야 한다. 자신의 창작열은 접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구도는 처음부터 충돌을 예고할 수밖에 없다. 이미 유효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채워질 수 없는 왕년의 할리우드 스타 노마의 과거 지향적 , 강박적 인정 욕망과 지금 당장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조의 미래 지향적, 현실적 인정 욕망이 충돌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인정 욕망의 끝없는 전쟁터일지도 모른다. 인정의 상호 부조 시스템을 구축한 온라인에서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오프라인에서는 약간의 예의를 갖춘 듯한 태도로 나를 봐달라는 아우성이 울려 퍼진다. 봐달라는 사람은 너무 많은데, 봐줄 놈은 별로 없다. 그러니 사야지, 별 수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인정 받을 것인가. 누구에게라도 그건 삶에서 늘 중요한 숙제다. 타인의 욕망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인정 받는 방법, 타인을 억지로 동원하거나 고용하지 않고 인정 욕망을 충족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게 가장 현명할 것이다. 경험칙상, 그 방법은 딱 하나다. '사랑'이다. '사랑하는 척' 말고 진짜 사랑 말이다. 사랑은 서로를 착취하지 않고 인정한다.

빌리 와일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선셋대로'는 필름 누아르 고전으로서의 양식미를 갖추고 있다. 필름 누아르의 양식미는 같지만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욕망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결국 파멸로 이어지는 상황을 펼쳐 보인다는 것이다. 욕망의 충돌이야말로 모든 이야기, 모든 영화가 사랑하는 주제다. 그러니 인간, 혹은 인류의 욕망이 가장 거대하게 충돌했던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 할리우드에서 필름 누아르가 태동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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