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student cafeteria

in #university6 years ago

나는 일곱 군데 직장을 다녔으면서도 직장 내 성희롱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를 두 번밖에 겪지 않았다. 어찌 보면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는 편인데, 다만 그것이 모두 나의 모교에서 이뤄졌다는 점은 많이 씁쓸하다. 첫 경험은 대학원에서 조교 일을 하면서, 두 번째 경험은 대학 출판부에서 일하면서였다.

평균보다는 멘탈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성희롱의 경험에 대해 쓰려니 쉽지 않다. 괴로운 기억과 상처 자체도 문제지만, 미묘한 인간관계의 면면들이 ‘성희롱’이라고만 뭉뚱그릴 수 없는 행위들 속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60전후의 남성들과 근무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성차별이나 여성혐오, 성희롱 문제에 예민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점잖은 분들이다보니 초기에는 그런 기미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편해지니까 아무래도 구세대의 관습들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대화들이 많아졌다. 식당에서 떠드는 여성 무리에 대해, 여성 운전자들에 대해, 그리고 여성의 역할에 대해,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참고 들어야 하는 괴로운 시간들이 많아졌다.

인쇄소의 협찬(?)으로 점심이 무료이기도 했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모두 당연히 함께 봉고차를 타고 학교 밖으로 나가서 출판부장의 기분에 따라 정해지는 식당에 가야 하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출판부장은 문화적 다양성을 겸비한 사람이라 외국 음식도 종종 먹을 정도로 메뉴는 다양했고 오랜 연륜에 의해 축적된 맛집 정보 덕분에 음식의 질은 보장되었다.

그러면서 정이 들었는지, 아니면 같이 일하는 과정에서 싹튼 것인지, 어느 순간, 아무래도 부장이 나와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멋쟁이 할아버지인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점점 아련해졌다. 그러면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걸 아는 듯이, 침울한 표정도 더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연민을 가지고 대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겨우 30이 넘은 어리디 어렸던 나는 그저 소름이 끼쳤을 뿐이다.

우리는 노인들에게서 생식의 욕구(성욕)를 발견할 때 혐오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61세의 귀여운 할아버지였던 과장이 파티션 너머로 나를 쳐다보며, ‘요즘 입병이 나서 아내가 뽀뽀를 안 해준다. 심통이 난다’는 말 같은 걸 할 때면, 나는 그냥 웃어넘기는 대신 혐오감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것 같다.

64세의 부장은 자제를 잘 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불쑥불쑥 나를 향한 연모의 감정을 표출하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비 오는 날, 봉고차를 타러 가면서 그가 우산을 받쳐주려고 했다. 극구 거절하는 나에게 “우리 공주님 감기 드실라” 하며 허리를 감쌌다.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학교 내 신설된 양성평등센터를 찾아갔다. 갓 부임한 소장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 역시 계약직이라며, 아마 그래서 더 괴로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우리는 학교 인력 관리의 부당함과 한국 내 여성의 지위에 대해 함께 성토했다.

하지만 소장이 권해준 처방은 다소 유화적인 것이었다. 출판부 내 직원 전체에게 드리는 편지를 쓰라고 했다. 모두 남성뿐인 직원들 사이에서 여성으로 일하는 애로 사항을 이야기하고, 한국 사회 일반의 문제로 화살을 돌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양성평등센터 소장과의 상담 후에, 권유에 따라서, 이런 편지를 쓰게 되었다고도 쓰라고 말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았고, 나는 그대로 했다.

퇴근 시간에 갑자기 모두를 불러세우고 편지 봉투를 주섬주섬 꺼내 나눠주는 나를 보며, 네 명의 남자 상사와 동료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편지 내용을 보기 전부터도 그랬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나는 약속이 있다며 점심시간에 혼자 나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출판부 사람들도 가끔 오기 때문에 교직원 식당은 갈 수 없었다. 아직 대학원에 남아 있는 친구들을 찾아 문과대 식당도 갈 만큼 가자, 나는 혼자 학교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식당들을 찾아다녔다. 넓은 대학 안에는 식당이 많이도 있었다, 공학관의 찌개, 어학당의 브런치, 심지어 대학 병원의 백반들까지 일삼아 골고루 찾아갔다.

학부 때 친하게 지내던 남자동기가 아직 학교에 남아 박사과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를 그나마 가장 자주 만났고, 그런 때가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었지만, 그도 매일 나와 점심을 먹어줄 순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곧 열 살 어린 학부생 후배와 열애를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몇 달 동안 매일 혼자 점심을 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번에는 가장 싸고 큰 학생 식당으로 향하는데, 그 후배 여자애와 딱 마주쳤다. 보아하니 그녀도 혼자 점심을 먹으러 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대뜸 나에게 “오빠가 많이 힘들어해요. 언니가 좀 도와주세요.” 라고 말했다. 아주 나중에, 나의 남자 동기가 당시 우울증으로 고생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옥 같은 직장 생활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그의 여자친구의 뜬금없도록 절절한 호소는 마치 적반하장과도 같은 외침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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