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제주도 자전거 일주 4. 외돌개, 교래리-붉은오름

수년 전 여름에 자전거로 다녀온 제주도 사진을 정리하며 1편과 2편, 그리고 3편에 이어 하루 단위로 나눠 쓰고 있습니다.
숙소가 문제였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가로등이 어두운 게 문제였다. 전날 밤에는 길의 차선 도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할 때까지 숙소를 잡지 못했다. 하루에 어느정도 갈지도 모르고 평소에 밤늦게까지 움직이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 늦은시간까지 돌아다니고 싶었는데 오후 7시쯤 되니 사방이 조용하고 어둡고 막막했다. 그 와중에 마을에 왔다 싶으면 휴대폰으로 근처의 숙소를 검색해서 하나하나 연락했는데 나 같은 대책없고 준비없는 손님이 갈 숙소는 잘 없었다. 어쨌든 늦은 시간에 주인은 없고 내 또래의 투숙객만 모인 게스트하우스를 운좋게 찾아 들어갔는데 술판이 벌어졌다.
거기서는 내가 막내였다. 갹출한 돈 몇푼을 손에 쥐고 근처의 치킨집과 점빵을 돌아다니며 술과 먹을 것을 서너번 사다날랐던 것 같다. 아프니까 청춘 따위의 책이 나오기 전이었는데 다들 힘들게 살고 있는듯 했다. 오늘밤은 친한 사람들처럼 깔깔거리기도 했고 지인들과 나누지 못하는 고민이나 이야기를 '내일이면 헤어질 관계였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었다.
지금 나이에 직장에서 하는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술이 오르면서 이상한 친밀감이 느껴지고 그 자리의 모두가 어딘가에 함께 속한 느낌이 드는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그런 느낌은 술이 깨면서, 새벽이 깊어가면서, 술자리의 끝이 보이면서부터 신기루처럼 흩어지고만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지금은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어디서 왔는지, 몇 명이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흐르는 물에 나뭇가지로 쓴 일기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해가 밝았고 거실에서 마주친 사람들끼리 젖은 머리칼에 수건을 덮어쓰고 쭈뼛거리며 하는 어설픈 인사 몇 번으로 모두 자기 갈 길을 갔다. 체크아웃 시간까지는 좀 여유가 있어 나는 숙소에 조금 더 있기로 했다. 서비스로 비치된 공짜 식빵을 구워먹었고 혼자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셨다. 아침에 혼자 햇볕을 받으며 바다를 바라보면서 마시는 커피는 처음이었다. 약 11.75초간 매우 감동적인 순간이었고 이 숙소에 하루 더 묵으면서 빈둥거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30초가 지나자 매우 심드렁해졌다.
예전에 누군가가 제주도에 가면 꼭 사려니숲길을 걸어봐야한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지금이야 드라마 때문에 유명했지만 당시에는 그리 인기있던 곳이 아니었다. 예약을 하고 탐방센터에서 신분 확인을 한 다음에 들여보내준다는 말이 있어서 어찌저찌 숙소의 컴퓨터로 오후에 들어가는 걸로 예약을 했다. 버스 시간도 확인했다. 오전은 자전거를 타고 주변만 적당히 둘러보다가 점심때쯤 서귀포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일정을 맞출 수 있다. 그래서 이 날은 멀리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숙소 바로 앞에 보이는 섬이 범섬인가 뭔가라고 어제 들은 것 같다. 숙소 옆엔 스쿠버 장비를 취급하는 가게도 있었던 것 같다. 자전거를 타고 어제 가던길을 이어서 나섰다.
귤 밭 옆, "귤 한 망에 천원, 돈 통에 넣고 가세요."
예전에 내가 살던 동네에도 손수레에 '최신가요'라는 이름의 불법복제 카세트테이프를 쌓아놓고 파는 손수레가 있었다. '길보드차트'라고 불리던 노점 중에 일부는 저렇게 돈통만 놓아두고는 주인이 없곤 했다. '도난은 생각하지 않는걸까. 아니면 저격수처럼 보이지 않는 어디선가 돈통을 노려보다가 돈을 넣지 않고 물건을 가져가는 놈이 나타나면 당장 나타나서 그 손을 낚아채는 것일까' 생각하곤 했다.

햇볕이 너무 강해 지쳤다. 피곤해서 벤치위에 쓰러진다. 실눈을 뜨고 폰으로 나를 겨냥하고 셔터를 누른다. 이런짓도 한 번씩 해본다. 심심하기 때문이다.
길바닥에 카메라를 놓고 타이머를 설정한 뒤에 얼른 뛰어가 자세를 잡는다. 이런짓도 한 번씩 해본다. 심심했기 때문이다.
눈은 무심히 먼바다를 쳐다보고 손은 꾸물거리며 셔터를 누른다. 이제는 이런짓을 그만하기로 했다. 여전히 심심했기 때문이다.
보도블럭 위로 게가 기어다녔다. 저기 방파제도 아니고 인도도 아니고 선착장도 아니고 강둑도 아닌 곳을 걷다가 파도를 만나 신발이 다 젖어버렸다. 이제 심심하지 않다. 대신 발이 찝찝하고 짜증이 난다. 그제서야 자전거를 끌고 외돌개를 향하기 시작했다.

(오해주의: 바위에서 뛰어내리려고 찍은 사진 아님)
가다가 멋진 풍경이 보여 젖은 신발을 말리며 쉬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카메라를 건네주었더니 만세를 해보란다. 만세를 했더니 '아, 그건 벌 서는 자세 같잖아요 다시 만세 해보세요'라더니 한참 여러 자세를 취하게 한 다음에야 사진을 찍어줬다. 이상한 사진사였다.
가다가 울타리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으면 좋을 것 같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랬더니 이런 모습을 찍어놓았다. 제목은 '구걸하는 여행객'이 어울릴 듯 하다.

도착. 나는 대장금을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장면이 있었나보다. 중국인들이 많았다. 지나가는 중국인에게 '픽쳐 플리즈'라며 사진을 부탁했다. '할머니 3인의 즐거운 제주여행'이라는 제목이 어울릴 것 같다.
파도도, 멋진 풍경도 5분이 지나면 심드렁하다. 이제 오늘의 목적지인 사려니숲길을 향해야 한다. 서귀포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교래리에서 내려서 가야한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10여분 정도 걸었던 것 같다.

입구에 있는 지도. 내가 예약한 사려니숲길은 원래 '현위치 지점'에서 출발하여 아래의 '탐방제한구역'을 통해 계속 내려가서 사려니 오름을 지나가는 코스였는데 길을 착각했다. 길을 잘못들어서 우측 붉은 오름쪽으로 빠져나갔다. 가보니 예약도 필요없는 2~3시간짜리 숲 산책로 정도였다.
숲을 걷다가 아저씨들이 단체로 여행왔는지 자기들끼리 떠들며 걷다가 갑자기 내게 말을 걸었다. 자기들은 모두 대학동기간이며 미국과 한국에서 전자쪽 사업을 하는 사람들인데 1년에 한번씩 제주도에 와서 얼굴을 보고 간다며 '너 임마, 혼자 여행하면 심심하잖아. 우리하고 같이 다니자.'는데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혼자하는 여행은 생각보다 심심했고 여행에서 만난 다른 무리와 섞여서 걷는 건 생각보다 어색했다.
그 중 한 분이 나를 아들삼고 싶다면서 나중에 결혼할 때 꼭 연락하라고 연락처도 주셨다. 자기 조카인지 친척이 대구에 곧 자리를 잡는데 니네 직장에 괜찮은 여자 있으면 소개도 좀 해달라는 류의, 어른이 손아랫사람 마음 편하게 해주는 너스레도 하셨던 것 같다. 아쉽게도 이날 받은 연락처는 여행이 끝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 사진도 원래는 대구가서 보내드리기로 했던 것이다. 혼자 여행을 자주 다녔지만 나는 여행에서의 인연을 오래 갖고가는 재주가 없다.
숲길 끝. 나는 여기서 버스를 타고 다시 서귀포 터미널에 가야한다. 누군가가 갑자기 뜨아한 제안을 하셨다."너 임마, 혼자 여행다니면서 어차피 오늘도 혼자 잘꺼잖아. 우리하고 같이 가자. 회 떠서 갈껀데 니꺼까지 푸짐하게 뜰게. 내가 너 딱 보니 오늘 하루 자전거 더 타나 안타나 똑같은데 여기서 버스 기다리는 것도 지겨울테고.. 우리 봉고차 렌트해놨거든. 그거 같이 타고 가자."
외국 악센트가 살짝살짝 섞인 부들부들한 서울말에 어떻게 거절도 못하고 어영부영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같이 시장에 가서 회 뜨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아 이거 시장에서 터미널까지는 가기 쉬울 것 같은데 그냥 죄송합니다 즐거운 여행되세요 인사하고 나올까?

어영부영하다보니 섭지코지에 있는 숙소에 같이 따라오게 되었다. 어설프고 어정쩡한 내 성격이 여행을 통해 바뀌기를 약간 기대했기에 폐 아닌 폐를 끼치며 같이 와 있기는 했지만 어설프고 어정쩡한 성격이 그리 쉽게 고쳐지겠는가. 50~60대 아저씨들이 주로 하는 대화들, 사업에 대한 이야기들에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맞장구쳤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혼자 자전거 여행하는 젊은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왠지 재미있고 이야깃거리가 많은 놈'의 옷까지 함께 덮어썼을지도 모른다. 노력했지만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가벼운 음담과 앞으로의 경제상황에 대한 가벼운 진단들, 내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으면서 거실을 가득 채우는 CNN뉴스 소리가 어우러진 묘한 밤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도 잠이 오지 않아 바닥에 누워 눈을 말똥말똥 천장만 바라보며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 날이 밝으면 다들 서울로, 미국으로 떠난다고 했는데 비행기 시간이 조금씩 다른듯했다.
그들은 나를 정말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 스스럼없는 열린 마음과 쉽게 호의를 베푸는 어른스러움, 각자 비행기표를 끊어 정기적으로 모여 골프치며 환담하는 경제적 여유가 부러웠다. 난 이미 어른이었지만 저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수년이 흘렀지만 그 때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적색은 자전거 이동, 흑색은 차량이동, 청색은 도보이동.
여행지 정보
● 서귀포시 천지동 외돌개
●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사려니숲길
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멋진 풍경에 가슴이 팍 트이네요~
고맙습니다. 오래 전이라 폰카와 디카의 성능 모두 좋지 않은편이었는데도.. 이번에 사진 정리하면서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ㅎㅎ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네요..ㅎㅎ
여행객은 심심했을지 몰라도 읽는 사람은 재미났습니다. 게가 제일 심심해 보였구요..^^
재미있게 읽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ㅎㅎ이 날은 자전거타고 이동한 건 거의 없고 오랜만에 도보여행객들처럼 천천히 다녔더니 작은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와우~ 저도 제주도 자전거 일주 꼭 가고 싶어요~
다음에 애들 다 크고 나면 스티미언 제주도 자전거 일주 밋업 한 번...?ㅋㅋㅋ
코인에 재능이 있으셨다면 좀 더 빨리 다가가실 수 있었겠지만, 야망을 줄이는 재능이 더 있는 편인 소시민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쪽이든 제 삼의 쪽이든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매번 글에 언급하는 바람에 컨셉이 되어버린 '코인 징징'이긴 한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 정도면 됐지'라며 만족하는데도 재능이 있긴 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제주 자전거로 돌고 싶습니다.
평생 한 번 정도는 해보면 좋을 일입니다. 애가 좀 자라서 배고픔과 피로함을 견딜 능력을 갖추면 아이와 한 번 더 돌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