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stimcity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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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토록 바라던 눈을 만났다. 원했던대로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오늘은 아버지의 음력 생일이라 케익을 어플로 주문하고 찾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이너스 10도란 말에 있는 옷, 없는 옷 전부 다 껴입고 나갔다. 전날 방심하고 얇은 레깅스만 입고 나가 살갗이 아팠기에 더 중무장을 했다. 얼얼하고 뜨거우면서 쓰라린 살갗은 아팠지만 살아있는 내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게 좋았다. 그러나, 연달아 두번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딱히 바람도 거세지 않았고 어떤 징조도 없었다. 아파트에서 봉천동 달동네로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한참 걷는데 눈발이 하나 둘 떨어졌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와, 눈이다.'

수줍게 뱉고는 배시시 웃었다. 케익을 찾고 돌아오는 길에는 성긴 눈발이 더욱 촘촘해졌다. 나는 신나서 사진을 찍었다. 친구들에게도 보여주고, 따뜻한 남쪽나라 '김해'에 사는 조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성미가 급한 어른들은 눈이 오기 시작할 때 부터 제설제를 뿌렸다. 제설제를 눈 뿌리듯 흩뿌리며 장난치는 두 아저씨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골치거리 였던 안경 김서림도 오늘은 낭만적인 순간의 장치가 되었다. 희뿌얘진 안경 너머로 자욱한 안개 속 눈이 펑펑 내리는 스산한 그 풍경을 보니, 문득 고은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시가 떠올랐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눈이 참 팍팍 나리고 있구나, 생각하며 오르막길을 걷는데, 할아버지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처럼 산처럼 수북히 쌓인 폐지가 담긴 수레를 조심스레 까치발로 밀며 내려오고 있다. 가파른 언덕 바닥에 제설제가 보였고 나는 성미 급한 어른들이 고마워졌다. 나는 한 손에 케익 박스, 한 손에 컵라면을 들고 있어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고 그가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오래도록 지켜봤을 뿐이다. 나는 어쩐지 케익 박스를 숨기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서 아파트 3층 베란다에서 하얗게 눈이 덮힌 사진과, 길에서 찍은 사진을 조카에게 문자로 보내며 덧붙였다.

"00아~서울에 하얀 눈이 펑펑 와서 자동차랑 집들이 하얀 모자를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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