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라떼는 말이야

in #stimcity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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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노노노, 춘자만의 방법 이즈 커밍


"그래도 마케팅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 물론이죠. 책 팔아야죠."

"아니 그러니까 뭐 흔히들 하는 거 있잖아요. SNS, 이벤트, 바이럴 마케팅 뭐 그런 거요."

"할 건데요. 왜 그러시죠?"



나름 마법사도 관련 업계에서 생업을 해온 터라 어떤 공식들에 길들어져 있다. 그건 한다고 보장은 되지 않지만, 그래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교회 십일조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성공하면 십일조 때문이고 실패했다고 해서 십일조 탓을 하지는 않는, 뭐 그런.. 하지만 그걸 춘자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노파심일 뿐이다. 그래도..


"음.. 마법사님이 무슨 얘기 하시는지 알아요. 하지만, 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들 마케팅하는지 저도 잘 알지만, 전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아요. #OOOOOO, #OOOO, #OOO 따위 태그 남발하고 '좋아요' 막 누르면서 사람 그러모으는 일은 구리거든요."

"글킨 하죠. 하지만 그래도 뭘 알리긴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꼭 나쁜 일도 아니고.."

"물론이죠. 나쁜 일은 아니지만, 음.. 구려요. '좋아요' 누른다고 책을 구매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래도 사람들은 그걸 해요. 그래야 마음이 편한가 보죠? 춘자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춘자만의 방법을 찾을 거거든요."



춘자만의 방법? 그건 뭘까?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운칠기삼의 세상에서 판매는 결국 운의 영역이다. 문화 콘텐츠 산업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재기나 밀어내기 같은 술수를 쓰는 게 아니라면. 그러나 라총수는 매우 단호한다. 뭔가 진심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가식적 방법에 대해 싫어하다 못해 경멸한다. 특히 #OOOOOO 태그는 아주 진절머리를 내면서 몸서리를 쳤다.


"#OOOOOO만 보면 아주 짜증이 나고 소름이 끼쳐요. 마법사님, 저 왜 이러죠? 다들 그걸 못해서 안달인데 전 아주 싫거든요."



니 맘인데 그걸 내가 알겠는가. 암튼 분명한 건 라총수는 호불호가 매우, 엄청나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싫은 것과 좋은 것. 그 차이를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람을 마법사도 살면서 몇 명 못 본 것 같다. 게다가 얼마나 단호하고 타협이 없는지 피터 작가는 꼰대도 세상 이런 꼰대가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산다는 것은 대충 무뎌지는 것이고, 성숙이든 타협이든 어쨌든 주변에 물들어가는 것이라면 라총수는 한 번도 넘겨보지 않은 빳빳한 새 책 같다. 그는 언제나 아랑곳하지 않으며 세상에 "난! 나는!"을 외쳐 대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리고 춘자를 성장시키는 일에도 그것은 변함이 없다.


"아니.. 다 좋은데.. 책을 팔기는 해야죠. 마법사도 그래야 먹고 살지. 내 지분도 있는데.."

"아, 마법사님 걱정 마세요. 제가 행복하게 해드릴 거니까요. 기다리시라니깐요. 하하하"



대책 없이 웃는 그가 때론 야속하기도 하다. 할 일이라는 것, 관행이라는 것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 하는 거다. 어차피 되고 안 되고는 운의 영역에 있으니 운이 우리에게 몰려올 때까지 뭐라도 하는 시늉을 해야 나중에 '이게 나의 성공비결'이라고 뻐드겨 볼 것 아닌가. 그냥 '운이 좋았어요.' 하기에는 뭔가 아쉬우니까 빗자루질이라도 하고 '바이럴 마케팅'이라고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댓글 노가다라도 해야 '성공의 원인은 소통'이었다며 자랑이라도 할 게 아닌가. 그런데 라총수는 그게 싫단다. 구리단다. 그리고 뭔가 방법이 있을 거란다. 그게 뭘까? 그런 게 있을까? 노파심이 자꾸드니 마법사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다. 생각이 든다. 이러다 꼰대가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이러다 뻔해져 버리는 건 아닐까? 라총수의 빳빳하게 날이 선 자존심 자락에 손이라도 베일까 섬뜩섬뜩 하다 보니 문득 마법사의 라떼 시절은 어땠는가 떠올려 보는 것이다.



마법사의 라떼 시절



마법사가 라총수만할 때의 일이다. 청춘을 바친 큰 전쟁을 끝내고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전쟁은 기적적인 결과를 내었고 모두가 포상의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마법사는 그 결과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5년여에 걸친 피 말리는 전쟁이었고 몸이 심하게 망가져 가는 걸 알면서도 끝을 보고 싶었기에 끝까지 매달렸다. 그리고 승리, 기적적인 승리를 경험하고 이제 쉬어도 좋겠다 마음을 놓고 있었다. 인생역전까지는 아니어도 수고에 따른 보상은 있겠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팔자 탓인지, 아니 팔자 탓이다. 정색하고 좀 심한 내용이 나와도 있는 그대로 듣는 편이 나을 거라던 역술가의 사주풀이가 기억났다.


00세에 배신운이 있고,
00세에 배신운이 있고,
00세에 배신운이 있고,
00세에 배신운이 있고,
00세에 배신운이 있고,
00세에 배신운이 있고,
00세에 배신운이 있고...



받아적다가 포기해버렸다. 마법사가 이번 생에 배신의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건 후에 역학을 공부하고는 알아버렸다. 세상에 이런 사주도 있구나. 하지만 그때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단순히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배신이라면 관계를 멀리해 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당해봤나? 운명으로부터 당하는 배신. 그건 참으로 절망적이다. 도망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걸 당했다. 그때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氏..發..



완전히 상심해서 분노가 가득 치밀어 올랐다. '아니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신체적, 정신적, 금전적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뒤라 아무 대책이 없었다. 심정은 극단으로 치달아 될 대로 되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직관은 나의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터무니없는 길을 제시했다. 아니 명령했다.


'아니, 나보고 취직을 하라고??'



미친 거 아니야. 다시는 출퇴근 하는 인생을 살지 않겠다며, 조직의 노예 생활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버텨온 게 벌써 몇 년인데, 그러자고 전쟁의 위험도 감수하며 이때까지 버텼는데, 이제 와서 실패도 아닌 승리의 업적을 세우고도 다시 조직으로 돌아가라고?? "내가 미쳤어! 氏發." 하늘에 대고 욕을 마구 퍼부었다. 그래 봐야 듣지도 않을 텐데. 벌렁 드러누워서 방바닥을 헤집고 다녔다.


'어디 한번 날 다시 움직여 봐, 한 발짝도 안 움직일 테니. 내가 이제 알았거든. 열쇠 꾸러미가 나한테 있다고. 그 인간들 열쇠 몽땅 가지고 사라져 줄 테니. 어디 한번 날 움직여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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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열쇠는 없을 것 같지?



제안을, 아니 명령을 개무시했다. 한 달이 지났다. 같은 제안이 같은 곳에서 또 제시되었다. '이건 또 뭐야. 한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못 뽑았어? 그런다고 내가 갈 줄 알아. 아주 대단들 하시네.' 다시 무시하고 제꼈다. '이건 마법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아무리 팔자는 못 고친다지만..' 다시 한 달이 지났다. 같은 제안이 같은 곳에서 또다시 제시되었다. '아 미친다. 삼세번이네.' 머리가 쭈뼛 섰다. 설마설마했는데 삼세번이라니. 이건 빼도 박도 못 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직관이 분명할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팔자건 뭐건 모든 책임은 내게 돌아온다.


'좋아. 알았어.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내 떨어져 주지.'



원서를 썼다. 이력서도 아니고 입사원서를 양식에 맞춰 제출하란다. 이게 도대체 얼마만의 입사지원인가, 어이가 없어도 한참 없어서 한참을 모니터를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작심하고 떨어져 주겠다며 원서를 채워나갔다.


'첨부파일 참조, 첨부파일 참조..'



성장 과정을 쓰라고? 900년 인생을 어케 A4지 반절에다 기록하나? 됐어 첨부파일이나 참조해. 그런 식으로 모든 칸을 메꿨다. 첨부파일은 프리랜서 시절 쓰던 프로필 하나를 달랑 첨부해 놓고, 사진은 규격에 맞는 반명함판 사진을 첨부하라는데 '내가 미쳤어, 사진 찍을 돈도 마음도 없다'며 운전면허증에 박힌 사진을 폰카메라로 대충 찍어다가 넣어버렸다. 될 리가 없지.


'OOO님, 서류전형에 합격하셨습니다. 면접일은 O월 O일 OO시 입니다.'



이런 氏發, 얘네 뭐야? 뭐 하는 애들이야! 왜 붙이고 지랄이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면접 보러 오라고? 좋아 개판을 쳐주마. 다들 말쑥한 정장 차림에 긴장한 표정으로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정장은커녕 귀걸이에 청바지, 구겨진 남방을 걸쳐 입고는 의자에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잔뜩 하찮다는 표정으로 다리를 달달 떨어주었다. 곁눈질로 쳐다보는데 다들 서로 아는 사이인지 뭐라고 쑥덕쑥덕대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뭐래니? 마법사 처음 봐! 확 그냥.' 한 소리해주려다 면접장으로 불려들어갔다. 같잖은 인간들이 잔뜩 폼을 잡고 앉아 있었다. 뭐라고 질문을 해대는데 아주 귀찮다는 목소리로 '네. 네.'거리다 나왔다. 면접관 중 한 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째진 눈으로 노려보던 것만 기억에 남았다.



제대로 한 건 했다. 마음이 좀 후련해지는 듯했다. 어디 이딴 걸로 퉁치려고. 자 마법사 팔자 안 좋은 건 알겠으니까, 뭔가 그럴듯한 제안을 해봐. 이따위 헛짓거리 집어치우고. 어따 대고 취직이야 취직이.



다시 버티기에 들어갔다. 소진한 금전 에너지가 딸그락 소리를 내며 바닥을 드러내었다. '이런 氏發, 이렇게 그냥 냅둔다 이거지. 알았어, 좋아, 나도 그럼 이번 생 그만할 테니까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구. 남 좋은 일만 시키다 갈 일 있어.' 버티자. 떨어질 대로 떨어져 보자. 바닥 그까이 거 안 쳐도 좋다. 무너진 자존심 안 세워 놓을 거면 내리꽂을 때까지 내리꽂아 볼라니까.



방을 뺐다. 아니 보증금을 다 까먹었으니 쫓겨난 거지. 낡은 자동차에 실을 수 있는 짐만 싣고 '氏發 그래 이젠 노숙이다. 까짓거 차에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디서 잘까? 차대고 잘만한 곳을 생각하다 자주 가던 삼청동 언덕길이 생각났다. '그래 경복궁이나 바라보면서 자자. 전생에 나라 팔아먹은 놈이 이 정도도 감지덕지지.'하고 내부순환로에 올라섰다. 그런데 그때, 따르릉~


"OOO님이시죠?"

"네? 전데요?"

"축하합니다. 합격하셨습니다."



야.. 이거.. 엿을 먹여도 아주 제대로 먹이는구나. 어쩜 이 타이밍에. 탈탈 털리고 바닥나서 노숙에 들어가는 이 타이밍에 하필. 하룻밤이라도 이슬 맞으며 잔 것도 아니고 방 딱 빼고 나오는 이 타이밍, 이 순간이라니. 정말 재수가 없었다. '나 놀리니?' 정신이 반쯤 나가서 내부순환로를 돌고 돌았다. 하늘은 왜 그리 파란지. 자존심을 포기할 수 없어서 출근을 시작하고도 몇 주간 노숙을 했다. 그리고 다시 방을 얻었다. 氏發, 좀 빨리 알려주던가. 그리고 <미생>의 장그래가 양말을 팔던 그 찜질방에서 첫 출근을 했다.



쟤 선수야



新사업팀이란다. 게다가 팀장이란다. 팀원은? 없단다. 예산은? 역시 없단다. 뭐 하자는 거야. 그럼 날 왜 뽑았어?


"그러니까 널 뽑았지."



어의없어 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사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날 뽑은 상사는 그렇게 말했다. 입사공고를 세 번이나 냈는데 앞에 두 번은 지원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나, 날 보고는 딱 감이 왔다나. 뭐 하자는 건지. 몇 군데 대충 전화 돌려보고 이 회사에서 이 사업, 가능하겠는지 전망은 있는지 의사를 타진했다. 다들 고개를 도리도리. 나라고 별수 있겠어.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이건 뭐 너무 터무니없잖아. 예산 한 푼도 없이. 그래 이럴 줄 알았지. 자, 내 임무는 마쳤다. 입사해 줬으니 이제 빨리 손 털고 나가자. '이따위 제안은 그만하는 거야. 이제!' 하늘에 단단히 일러주고 입사 일주일 만에 퇴사 타이밍을 보기 시작했다. 미련도 아쉬움도 없다. 게다가 도살장 끌려가는 것 같은 출근길은 여전히, 한결같이, 지옥이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상사는 출근은 하되 아침 회의만 참석하고 나머지 시간은 알아서 하라고 선심을 썼다. 퇴근은 맘대로 해도 좋다. 다만 일을 만들어 와라 이 말이다. 오~ 그래 그건 마음에 드네. 바늘방석 같은 아침 회의를 마치고는 부리나케 회사로부터 도망 나와 멀리 떨어진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숨을 몰아쉬며 아아를 들이켰다. 진퇴양난이 되어버린 거다. 나가자니.. 그냥 있자니.. 자존심을 굽힌 대가다. 상황에 환경에 하루이틀 익숙해지자 슬금슬금 타협의 마음이 올라온다. 요즘 이 취업난에 어디 가서 정년 보장되는 정규직을 얻나 싶다가도, 이런 氏發, 난 마법사라고, 남들 인생에 기적을 일으켜 놓고서는 정작 나는 이따위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라고.. 두 개의 마음이 하루종일 싸워댔다.



아, 이래서 내가 버틴 건데..
아, 이러자고 내가 버텼나..



그런데 불을 지른 건 그날 면접장에서 마음에 안드는 눈으로 째려보던 그 국장이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대더니 근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브레이크를 걸어대기 시작했다. '에라이~ 누군 다니고 싶어 다니는 줄 알어! 요놈 어디 잘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이 떠나가라고 치받아 버렸다. 국장은 어디서 굴러먹다 온 신참의 일격에 놀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너! 너.. 이 새끼가 어디서..'



그때 상사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왜들 이렇게 시끄러워! 아침부터" 하더니 국장을 끌고 자기 자리로 데려갔다.


"아니 선배, 저 새끼가 지금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야 O국장아, 참아.. 좀 참으라고 쟤 선수야. 저런 얘들이 뭘해도 해."



당장 사표라도 던질 생각으로 가방을 낚아채서 사무실을 등지고 나오는데 나 들으라고 하는 얘기인지 그 소리가 기가 막히게 고막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쟤 선수야."



이런, 氏發. 선수란다. 그래 마법사는 선수지. 선수가 이렇게 도망치면 쪽팔린 일이지. 아 氏發. 도망가긴 글렀네.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장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던가. 이런 氏發 마법사도 남자라고. 저런 소릴 듣고 어케 도망치질 못하겠네. 좋아! 그럼 실력을 보여주지!



정.면.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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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두꺼운 회사 노트 두 권을 모두 채워가며 미친 듯이 달렸다.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고 다녔다. 다행히 그래도 나름 이름이 알려진 회사였던 터라 만나는 주었다. 그러나 사업 제안을 하면 대부분 도리도리.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나는 선수다. 홈런을 쳐야 한다. 안타라도, 번트라도 대야 한다.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려면. 조까튼 운명에 빠큐라도 날리려면. 氏發, 뭐라도 보여줘야 하잖아!



제대로 걸려든 거다. 그리고 항문이 파열되었다. 스트레스성 급성 항문 파열. 말 그대로 똥줄이 탄 거다. 치질도 앓은 적이 없는데 피똥을 싸다니. 아침 회의가 끝나고 일어섰는데 가죽 시트에 물기가 있길래 손으로 훑었다. 피였다. 이런 바지가.. 다행히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선수가 이깟 일로 피를 보다니. 쪽팔린 일이니 슬쩍 휴가를 내고 수술을 받았다. 그때 멈췄어야 했다.



똥줄이 탄 덕분인지, 사업은 마침내 돌파구를 찾더니 반년이 지나는 시점에 이르자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 대형 계약을 성사시킨 거다. 마법사는 예산도 없이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무작정 돈 있는 곳을 찾아갔다. 정부의 모태펀드 운영 설명회에 펀드 운용사도 아니면서 무작정 쳐들어갔다. GP(펀드 운용사를 말함. 그때는 GP가 뭔지도 몰랐다.)만 참석하는 회의장에 슬쩍 들어가 명함을 돌렸다.


"아, OOO사에서 오셨네요. OOO사도 펀드를 운용하나요? 아님 출자라도 하시려구요?"

"아.. 네.. 뭐.."



다행히 회사 이름값 덕분에, 펀드 출자라도 하려는가 보다 생각했는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마법사는 시치미를 떼고 앉아 "그게 수익률이.. 요즘 좀 그렇죠?" 아는 척을 해댔다. 관심 있어 하는 몇몇 펀드 운영사들과 인연을 맺고는 이리저리 쑤시고 다녔다. 그리고 계약이 성사되자마자 무작정 쫓아갔다. "이거 함 투자 안 하실래요?" 운 없는 누군가 들은 "그게 되겠어요?" 했고 운 때가 들어선 누군가 들은 "오! 이거 좋은데요." 했다. 그리고 대박이 터졌다. 그 한해는 그 프로젝트로 대한민국이 신드롬에 빠져 버렸다. "그게 되겠어요?" 한 누군가 들은 그 프로젝트를 돌려보냈다는 이유로 짤릴뻔 했고, "오! 이거 좋은데요."한 누군가 들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마법사 역시, 회사 일 년 매출의 3배를 혼자 해냈으니 말 그대로 초대형 대박이었다. 사보에 대문짝만하게 나고 직원 표창까지 받았다. 그리고 마법사 덕분에 전 직원 연봉이 일제히 인상되었다. 문제의 그 국장까지, "미안하다. 난 니가 이런 걸 할 줄은 몰랐어." 안다. 방바닥을 굴러다니던 지난해 나도 몰랐다. 당신이 삿대질을 해가며 근태 운운할 때만 해도 다 때려치울라 했다. 그러나 이건 실력이지만 운이다. 그해, 역술가들이 하나같이 내게 대운이 들었다고 말했던 그해였던 걸 나는 한해가 다 지나가는 시점에서야 떠올렸다. 아 맞다. 뭘해도 대박일 거라고 했었는데, 교수면 학장이 될 거고 회사원이면 임원이 될 거고.. 뭐든 무엇이든. 이런 氏發, 그 운을 이 회사에 고스란히 갖다 바쳤네.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는가? 팔자 사나운 이의 행운은 한해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운이 기우는 걸 느낀 건, 이듬해 여름이 지나면서다. 입사 전 약속했던 인센티브 계약을 상사가 슬며시 지우자고 협상을 걸어왔다. "뭐 안주겠다는 게 아니고 계약서 조항에서만 지우자고. 이게 주주총회에서 문제가 될 수 있어서 말이지." 무슨 소리? 이렇게 대박이 날 줄 몰랐겠지. 氏發, 마법사를 뭘로 보고. 아.. 이 인간의 마음에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구나. 마법사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물론 인센티브는 계약대로 집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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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는 움직일 때 자라나고
두려움은 망설일 때 자라난다.'



그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너무 큰 꿈을 꾼 탓일까? 아님 자신을 업신여긴 탓일까? 사업의 성공으로 부웅~ 하고 떠오르자 덜컥 겁이 났는지 마법사를 알아본 선구안은 온데간데없고 욕심으로 버무려진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분위기는 그 이후 정확히 180도로 반전되었고 사업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야 성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미 배가 난파하기 시작한 거다. 탈출해야 했다. 마법사에게 선택권은 없다. 마법사를 뽑은 이도 그이고 두려움에 휩싸여 마법사의 보상을 깎으려 든 것도 그였다. 그리고 팔자 조카튼 마법사지만 마법만큼은 언제나 일관되다. 용기가 멈추고 두려움이 찾아들면 기적은 저주로 바뀌고 행운을 고스란히 토해내게 된다는 것. 특히 누군가 마법사에 대한 보상을 하찮게 여기는 순간 그것은 여지없이 발동된다.



마법사는 탈출권을 사용해야 했다. 그건 미루고 미루던 건강검진이었다. 그럴듯하며 완전한 핑계는 건강상의 이유뿐이다. 그걸 써야 한다. 두려움에 휩싸인 자가 앞뒤를 가리지 않기 시작하면 매우 피곤해진다는 걸 이미 충분히 경험했으니. 마법사는 두려움에 휩싸인 자의 곁에 머물 수 없도록 규약에 정해져 있다. 사라져야 할 때다. 마법사는 알고 있었다. 검진을 받게 되면 뭐가 나와도 나올 거라는 걸. 아마 그 상사가 마법사를 좀 더 믿어주었더라면, 선수를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마법사는 그 탈출권을 쓰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다른 우주에 들어와 있겠지.



여지없이 선고가 떨어졌고 결과가 나오자마자 입원해버렸다. 수술을 받고 그대로 회사를 떠났다.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마법사가 떠나자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그리고 회사는 마법사가 일으킨 대박을 고스란히 반납하고 상사 역시 덕분에 연임되었던 임기를 다시 반납한 채 스스로 사직해 버렸다. 마법사는 불미스러운 신문 기사를 통해 그 사실을 접하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법사의 투자 제안에 "오! 이거 좋은데"하며 흔쾌히 결재해준 그 누군가의 상사는, 마법사의 상사가 노리던 우리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그리고 그 사업과 그 업계는 그해의 신드롬을 끝으로 연이은 악재를 맞으며 장기 침체에 들어가 버렸다. 관계자들은 마법사에게 어떻게 알고 그 타이밍에 손을 뗐냐며 신기해했다. 그런 대박을 치고는 연달은 기회들을 모두 내려놓고 그렇게 사라져 버리다니. 아무리 암이라지만..





라총수가 싫어도 너무 싫다고 진저리를 치던 그 태그의 주인은 그리고 얼마 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웃자란 탓이다. 마케팅이란 걸 해댄 탓이다. 바이럴 마케팅의 대명사가 바이럴에 휘말려 죽어버렸다. 안타깝다 해야 할지, 그럴 줄 알았다고 해야 할지. 사업의 관행, 마케팅의 ABC를 따라봐야 구린 건 구린 거다. 운 좋은 놈이 짱일 뿐이다.


"그래, 맞아요. 그건 좀 구리죠. 그쵸?"

"그럼요. 마법사님 걱정 마시라니깐요. 춘자가 잘 자라서 마법사님 행복하게 해드릴거라구요. 하하하"

"아, 네.. 네.."



춘자는 지친 마법사를 행복하게 해줄까? 애쓴 창작자들을 마케팅의 ABC에서 해방시켜 줄까? 세상의 모든 선수들이 더이상 똥줄 타도록 클릭질 하지 않고 어설프게 얼굴 팔고 다니지 않아도 콘텐츠의 힘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세상을 열어줄까?



드라마 '허쉬'의 고인물 한준혁 기자는 이제 깨어나기 시작했다. 춘자만큼이나 깐깐한 신참 수습기자의 일갈에 정신을 퍼뜩 차리고는 예전의 자신, 뜨거웠으나 식을 줄 몰랐던 뚝배기 같던 때의 자신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명함을 팠다. 그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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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1/3이 지난 드라마는 저 말의 뜻을 알려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마법사는 안다. 그것이 무엇의 약자인지.


H 하하하
U 웃기고 있네
S 셧더퍽업 마케팅,
H 행복하니? 그래서 너 행복하니?



행복하니? 그렇게라도 팔아대면 행복하니? 그렇게라도 이름 석 자 알리면 행복하니? 그런데 너 아니? 그게 다 운이고 팔자라는 거. 엄한 놈들한테 니 행운, 니 팔자 다 팔아먹고 있는 거라는 거. 난 모르겠다. 춘자가 라총수가 행복하게 해준다고 했으니 믿어보는 수밖에. 역술가도 부러워하는 팔자를 가진 그녀가, [스팀시티]의 동방박사 보얀님이 예언한 스팀만배의 그해를 향해 뚜벅뚜벅 타협 없이 걸어가고 있다는 거. 홍보, 마케팅 따위 개나 줘버리라며 오로지 마음과 뜻과 정성으로 정면승부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사를 꽁꽁 붙들어 놓고 있다는 거. 게다가 그녀가 그런 '춘자만의 방법'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팔자를 타고 태어났다는 거. 그녀의 강력한 호불호로 말이야. 세상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이상하고 아름다운 그 호불호로 말이야.



휘리릭~





P.S.
그런데 마법사의 배신운은 이제 끝난 거냐고?
내가 왜 휘리릭~ 휘리릭~ 거리겠어.
팔자를 못 바꾸겠거든 기술을 바꿔야지.
익절은 몰라도 그간 손절 기술은 기가 막히게 익혔거든,

그래서
휘리릭~







[위즈덤 레이스+Movie100] 002. 허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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