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부장의 라떼] 004. 어느 패션회사 마케터, 급 패션MD로 전향한 후기

in #stimcity2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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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대행사를 가려다가 그만두고, 어쩌다 패션회사의 마케팅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게된 나는 3년차가 되던 해에 상품기획팀으로 이동을 신청하게 된다. 패션회사에서 마케팅 직무란 너무 제한적이라고 느껴졌고, 패션 업계에서는 비지니스 전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직무가 MD라는 것을 알게 되며 자연스럽게 MD로 전향을 희망하게 되었다. 갑자기 공석이 생긴 상품기획팀에서는 어차피 막내자리라 사원급을 뽑아야 하고, 복잡한 채용절차를 통해 사람을 뽑으려면 몇 개월은 기다려야 하는데, 그나마 또라이는 아닌 것으로 검증된 내부 직원이 이동하고 싶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MD출신 이셨던 본부장님께서도 "MD업무를 알아야 비지니스 전반을 배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라며 은근히 본인의 경력을 추켜세워주는 이유로 신청하는 나의 부서 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셨다.

처음 MD가 되었을때 나는 형편없었다.

3년차였지만 MD업무에는 신입사원수준이였고, 그동안 홍보 담당이었던 나는 업무 특성상 엑셀은 지난 몇년간 열어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태생이 패알못이라 상품 보는 눈도 없었다. 재무재표 읽을줄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원가 개념도 없었다. 나랑 입사가 6개월 차이밖에 안나는 내 사수는 돌연 옆팀 동료였던 내가 부사수로 이동해오니 입장이 곤란한 것 같았다. 나를 신입사원처럼 막 대하면서 업무를 가르쳐주기도 모하니 그냥 마냥 나에게 친절하게만 대해줄 뿐이었다. 차라리 혹독하게 다뤄주면서 일을 가르쳐 주면 좋으련만, 나는 친절하고 잘해주는 사수가 내심 원망스러웠다. 결국 나는 인수인계따위는 포기하고 자력으로 갱생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엑셀부터
나는 일단 사수에게 엑셀책을 하나 얻어서, 우리팀에서 쓰고 있는 엑셀 파일들을 하나하나 열고 그 파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식들을 새 파일에 하나하나 똑같이 배껴서 만들어 보았다. 이때 내 기억속에 예전에 알던 수식들이 하나하나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학생때 광고대행사에서 인턴을 했었는데, 주 업무가 엑셀으로 시청율 통계 데이터를 뽑아 정리하는 것이었다. 복잡한 숫자들을 여러가지 수식으로 정리하고, 보기좋은 표로 만드는 것 이었는데 피벗, 매크로 같은 고급 기능도 사용해야만 업무를 할 수 있었다. 사용하는 수식은 몇가지 안되었고, 반복적으로 복사하고 붙여넣고 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으니 나는 중요한 몇가지 수식들은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그때 그 업무는 얼마나 지루하고 반복적이었는지 나는 그만 모니터를 바라보다가도 졸려서 눈을 감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마케팅팀으로 회사에 입사한 이후, 단 한번도 엑셀에서 합계 SUM 이외에 다른 수식을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왠걸, 그 때 억지로 억지로 기계처럼 익혀두었던 수식의 꽤 많은 부분이 지금 내가 사용해야하는 것들과 겹치는 것이 아닌가! 사용된 수식을 이해하자 상품팀 파일내의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수식을 따라 하나하나 읽어나가며 판매율이란 것은 판매량을 발주량으로 나눈 것이라는것을, 원가율이란 원가를 판매가로 나눈 것이라는 기본적인 개념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피벗, 매크로를 사용하면 지금 우리팀에서 사용하는 파일들을 더 쉽고 간편하게 개선 할 수 있는 것들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 둘씩 내것으로 만들어 가며 엑셀을 다시 손에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상품교육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없나?
상품에 대해 판매사들을 교육하는 것도 우리 MD들의 업무였다. 기존의 방식은 일일이 매장에 방문하거나 사무실로 모셔서 직접 교육 하거나 문서로 작성된 교육자료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매장을 방문하고 대면 교육 하기위해 거의 일주일 이상을 상품 교육에만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정이 너무 바빠 문서 자료만 전달할때는 교육 효율이 떨어진다는 영업부의 불만을 들어야 했다. 교육의 내용은 ppt를 띄워놓고 프레젠테이션 하는 방식이었는데, 자료만 전달해서는 효율이 떨어 지는 것은 사실 이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사람이 꼭 가서 설명해 줘야하는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보는사람이 자료와 상품 실물을 번갈아 보면서 성실하게 본다면 충분히 학습 효과가 있을 내용이었으나, 적극성과 집중도의 차이 때문이었겠지.

나는 안그래도 MD업무가 아직 미흡해서 시간이 부족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교육하러 자꾸 외근까지 다녀야하니 몸을 여러개로 쪼개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가 현장에 가지 않아도 효율적일 수 있는 교육자료를 만들어서 뿌리면 해결될 일이겠다. 나는 우선 사용하던 ppt 자료를 열었다. 그리고 내가 현장에서 실제로 프레젠테이션 하듯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목소리를 핸드폰에 녹음했다. 그리고 교육중에 상품 실물을 보여줘야 하는 부분에는 핸드폰 동영상으로 상품을 착용하는 모습, 안감 등으로 꼼꼼히 찍어서 비디오 클립으로 넣었다. ppt 파일의 슬라이드 순서에 맞게 목소리 파일, 영상파일 등을 종합해서 하나의 영상자료로 완성하였다. 그리고 모바일로도 볼 수 있게 웹 비공계 링크에 올려놓고 링크로 교육자료를 뿌렸다, 물론 ppt는 원래대로 제공했다. 매장판매사들은 핸드폰만 있으면 어디서든 동영상으로 된 상품 교육 자료를 볼 수 있고 실물 상품도 떠먹여 보여주니 직접 볼 필요도 없었다. 이 자료를 만드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나는 이 링크를 뿌리고 나서 매장에 교육하러 직접 나가야하는 일주일 이상의 시간을 벌게 되었다. 매장에서는 오히려 아무때나 본인이 필요한 부분을 여러번 반복해서 볼 수 있으니 편리하다고 좋아하였다. 교육의 효과 또한 기존 방식보다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간단한 동영상 만드는 스킬은 누구라도 마케팅팀에서 막내로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탑재되는 잔재주이다. 거창한 광고 영상이 아닌 간단한 홍보영상, 상품 소개 영상, 인터뷰 영상등은 예산이 빠듯한 회사에선 보통 막내들의 잔재주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것을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분들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수많은 상품 소개 동영상들에 자막을 스스로 달아보았고, 사장님 인터뷰 영상도 편집해서 홈페이지에 올려도 보았었다. 모두 돈들이지 않고 무료 프로그램들을 돌려가며 했었던 일. 이런 일을 맡아서 할때 나의 속마음은 "이런 예산도 없고, 나같은 비 기술자가 허접하게 만드는 영상을 웹사이트에 올리다니. 정말 우리회사는 별로야. 이게 무슨짓이람. 내가 이런거나 하려고 마케터가 된게 아닌데" 였다. 하지만 결국 이런 스킬은 나에게 기술로 남았고, MD가 되어서도 아주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트렌드 조사?
마케팅에서 배운 재주를 MD가 되어서 써먹은 사례는 아주 많다. 마케팅업무에도 소비자 트렌드, 경쟁사 트렌드 조사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 경험은 MD로 이동한 후 부족한 상품지식을 보완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소비자를 만나서 인터뷰를 하는 날것의 방식을 마케팅에서는 주로 미디어나 컨텐츠 트렌드 인사이트를 얻는 데 사용하였는데, MD가 된 이후 상품의 트렌드를 예측 하는 방식으로 변형하여 실행하여 보면서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다. 특히 마케팅 실무를 하면서 획득된 나의 네트워크, 패션 인플루언서, 패션지 기자 등등, 은 내가 상품 기획을 하는데 나의 든든한 트렌드 정보원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핸디캡이었던 비관련 경력의 경험을 나의 강점으로 활용하여 MD업무를 나만의 방식으로 배우고 발전시켜나갔다. 물론 말도안되는 시행착오들도 많이 있었다. 보고서에 엉뚱한 그래프를 붙이기도 하도, 환율계산을 잘못하기도 하고, 숫자에 0을 덧붙인 적도 있다. 다행스럽게 오히려 그럴때는 "쟤는 MD출신이 아니어서 그래"라며 조금 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는 분위기가 있었다. 자존심이 상할때도 있었지만 한번 한 실수는 다시는 하지 않도록 물고 늘어져서 고치고 배우고 바꿨다.

그리고 상품기획팀으로 이동한지 3년차가 되던해,
나는 해외 지사 신규 브랜드 런칭팀에 MD팀장으로 파견된다.
20대 후반 나이에 해외 주재원이 된 것이다.

그 이후 나는 상품과 마케팅 업무를 여러차례 오가며 경력을 쌓아왔다. 각기 다른 직무들을 경험함으로서 나는 한 직무에서만은 배울 수 없는 다양한 스킬들을 습득하게 되었고, 현재 MD 업무를 함에 있어서, 여타 다른 MD들과는 다른 강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모든 사람은 성장배경이 다르고 고유한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모두 각기 다른 자기 스타일로 일을 해나가게 되어있다. 어떤 알바 경험, 어떤 인턴 경험, 어떤 경력, 전공 들을 각기 무의미 한것이 하나도 없다. 본인이 꺼내어 활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중한 무기들 처럼 각자 자신 안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쓸모없는 경험, 쓸모없는 배움은 없다."

비전공자, 비관련 경력자. 라는 단어에 갇혀 패션회사 취업을 앞두고 고민을 하고 있는 많은 후배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단언컨데 모든 경험은 결국 각자의 자산이 될 것이다. 나의 경험담이 조금이라도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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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모 재밌어요. 주재원 썰 좀 풀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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