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호숫가의 돼지들: 들어가기 전에steemCreated with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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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작 소설을 연재하는 포스팅입니다. 이번 편은 정식 연재 전의 배경 이해 포스팅으로, 읽지 않아도 상관 없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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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배경의 이해 (읽기 생략 가능)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동맹을 맺었다. ……(중략)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중략)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현존하는 모든 사회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에 선언한다.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은 족쇄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는 세상을 얻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카알 마르크스(Karl Marx),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년

34년 11개월간의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되었을 때, 조선인들이 지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일제의 치하에서 그 일족의 안녕만을 최우선시하여 백성들을 팔아넘긴 조선 왕가에 다시 권력을 쥘 기회를 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해방된 조국을 다시 태어난 공화국으로서 번영시키기 위해 필요한 어떤 신념이나 결의, 계획 같은 것이 조선인들에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국가발전을 위한 로드맵을 스스로 제시할 역량은 당시의 조선인들 대부분이 갖지 못했다. 절대다수는 농사를 지을 땅을 재분배하는 정책과 공산주의 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농투성이들이었다. 당연히, 농사를 지으며 그저 살던 대로 매 해를 되풀이해 사는 것 말고는 몰랐으니 지성미가 있을 리 없었다. 일제의 교육차별정책으로 조선인 공학도나 과학자는 수가 매우 적었고, 당연히 조국의 기간시설을 재건하고 개선할 뜻 있는 공학자들이 있을 수 없었다. 지식인이라고 해 봤자 8할은 친일파였고, 그나마 조금 깨끗한 이라 해도 법 내지 행정에 조금 밝아 관료 노릇만 한 자였다. 관료가 아닌 지식인은, 대개 수준 낮은 문학가들이었다. 더욱이 이 조선의 문학가들은 자신이 조선 지식인의 선봉에 선 자들인 양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으며, 자신들이 어디까지나 일제의 억압 정책으로 인해 조선에서 직접적인 사회운동을 할 지식인이 나올 수 없었던 식민지적 특수성 덕분에 인기를 누렸다는 점은 까맣게 몰랐다. 더욱이 이 문학가의 9할은 또한 친일파, 부일배(負日輩)였고 나머지는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나마 여기서 남은 지식인을 추려 봐도, 대다수는 혼자 힘으로 먹고 살거나 궂은 일이라도 달게 하며 자기 삶을 꾸리지는 못하고 무슨 ‘운동’을 한다는 핑계로 자선사업가들의 돈을 울궈먹으며 국내외를 쏘다니던 얼치기들뿐이었다. 조선 광복을 그리며 산화한 독립운동가들의 가엾은 넋은 진정한 계승자를 단 한 명도 찾지 못했다. 그런 애국자는 조선 반도 내에는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의 맥을 완전히 끊어 버린 1930년 이래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경술국치 직후 해외로 탈출, 청춘을 불태우며 독립과 실력양성을 추진해 온 운동가들도, 귀국 후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이 회고록에서 조선 민중에 대한 비난과 모욕을 절제한 것이야말로 사실 그들에게 애국심이 남아 있었던 증거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간신히 까막눈이나 면하면 다행이던 자들이 인민의 80% 가량을 차지하던 상황에서, 그나마 먹물 먹은 자들 가운데 다시 8할이 좌익사상에 물들거나 밥그릇 싸움이나 하던 암담한 현실을 딛고 1948년에나마 조국의 새 정부를 수립해낸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기적조차 조선 반도에서는 반토막이 나 있었다. 1948년의 조선인들은 지성이 모든 문명의 기반임을 부정하고, 지성을 초월하는 이념을 찾아 목을 매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현실정치의 논리 따위는 차치하고 오로지 진영, 그리고 계급투쟁의 의식만으로 무조건 비난할 상대를 만들며 스스로를 신성시하는 증오의 헤게모니야말로, 사실상 지적 박약 상태에 놓여 있던 대다수 조선인들을 만족시킨 훌륭한 이념이었다. 이 사회주의의 물결이, 광복 후 채 5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한반도의 허리를 갈랐다. 그리고 남쪽의 동포를 침략하여 제 발 아래 꿇릴 궁리로 마흔여덟 번이나 수괴(소련 서기장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대며 전쟁을 조르는 민족반역자 김일성을 그 북반부의 우두머리 자리로 올려 주었다. 그 역사의 격랑(激浪) 속에서, 비록 과실이 있었다 하나 가히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 없는 정치외교적 감각을 지닌 지식인이 남반부에서라도 집권한 것은 1948년의 정부수립 성공에 뒤이은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단 한 푼의 산업적 역량도, 인프라도, 우수한 인력자원조차도 지니지 못한 신생 빈국의 지도자로서, 비록 과(過)가 있었다 하나 그 나라를 끝내 지켜낼 수 있도록 한 것은, 처음부터 부유한 나라가 계속 나라를 지켜내는 것에 비하면 질적으로 다른, 지독히 어려운 일이었다. 패망한 일본이나 독일의 재건에 비교해도 대한민국의 재건은 특히 어려웠다. 일본이나 독일은 최소한 전쟁 전부터 세계 열강의 그룹에 속하는, 기술력을 지닌 강국이었고 무너진 사회 인프라를 다시 세울 시간만 있으면 결국 부활할 수 있는 국가들이었다. 반면 대한민국에 남은 인프라는 일제가 이식한 것으로서, 조선인이 스스로 사용하고 발전시킬 지식이 없으면 고철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지렁이들을 교육하여 엘리트로 만들고, 엘리트가 젊음을 불살라 다시 사회 발전의 로드맵을 세우고, 전국민이 로드맵 이상의 노력을 하며 뼈를 깎고 살을 태워 나라의 부를 쌓아야 하는 판이었다. 수십 수백 번,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다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오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망국의 위험에 노출되어야 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생존은, 무(無)에서부터 때늦은 근대화와 산업화, 선진화를 새롭게 해나가는 도전과 질곡의 연속에 가까웠던 것이다.
혹자는 대한민국의 고난을 부정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인식은 의외로, 조선이 자생적 근대화에 성공할 잠재력이 있었으나 일제 침략으로 인해 기회를 잃었다고 보는 견해와 일맥상통하고는 한다. 그리고 이 견해가 발전하면, 대한민국은 조선을 역사적으로 계승한 정통 국가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말까지도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는 기초에서부터 허망한 이야기였다. 조선은, 근대 공업화를 위해 필요한 소재를 자체조달할 산업적 기반이 있는 나라였는가? 그럴 공업력이 있었는가? 하다 못해, 오백여 년에 이르는 왕조시대 동안, 근대화에 사용할 국부(國富)를 쌓았는가? 조선은 근대 공업화에 필수적인 산업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모든 어린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는가? 조선의 신분제는 외세의 영향을 받기 전 자체적으로 철폐되었는가? 조선은 스스로 화폐경제를 발달시켜서 은이나 금을 경제의 본위로 하여 당시 세계의 경제구조에 편입될 수 있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조선이 자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어휘는 ‘아니오’이다. 그리고 태어나지도 못한 근대 조선의 ‘적자’인 식민지 조선인들은 광복과 동시에 자신들 가운데 8할 가량이 ‘근대화된 국가에 산다’는 말도 다시 못하게 되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적어도 조선에서 식자(識字)층이라 자처할 수 있는 이는 누구라도 이 사실을 통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광복 후의 조선을 내버리거나 다른 식민지 출신 국가처럼 강국에 재편입되고자 두리번거리지 않았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주역들은, 강철의 의지로 조국 건설을 이뤄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역사에는 그처럼 많은 질곡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독보적인 것은, 민족반역자라 일컬어 마땅할 북반부의 수괴 김일성이 동족을 침략하여 빚어낸 3년간의 전쟁과 그로 인한 국민, 사회인프라, 물자의 치명적 상실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다시는 재기할 수 없으리라 만인이 믿었던 옛 식민 지배국 일본이 한국에 전쟁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미국의 원조를 받고 공업시설을 재건하고 이를 통해 번 돈으로 경제부흥을 일으키고 1950년대 말엽에는 전후탈출선언까지 해내는 데에 이르게 된 비참한 사건도 간과할 수 없다. 동족의 피를 삼켜 뱃살을 찌우려 든 공산주의자들이, 정작 옛 침략자의 살을 다시 찌운 것이다. 그리고 그 이래로 70여 년간, 추종자에 가까운 라이벌로서 대한민국이 일본을 상대로 하는 괴로운 추격전에 나서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가 뒤집어질 수 있었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예컨대, 일본이 미국의 재건계획에 원천적으로 동참할 수조차 없었다면, 역사의 비극은 한결 경감될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그 계기로는 무엇이 있었을까? 우선, 소련의 소-일 불가침조약 파기 후 침공이 일본 본토에 집중되면서도 한반도를 완전히 잠식하지는 못하게 하는 사태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실제 역사에서보다 더 크게 피해를 봄에 따라 최대한 일본 측으로부터 전후복구를 위한 자원을 뽑아가야 하게 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즉, 소련이 자잘한 일본의 식민지나 괴뢰국은 거점점령 수준으로만 처치하고 지나치면서,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반도에 미군이 진입하는 것은 막지 않고, 오히려 미군에 의한 본토침공작전 이전에 먼저 일본 본토 전역을 점령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쿠르스크 공방전에서 독일이 승리하여 마침내 소련이 모스크바까지 진격하는 독일군을 목도, 우랄 산맥 동쪽으로 국가의 핵심을 옮겨 버리는 상황 정도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는 실제 역사에서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상병 출신으로 군사적 안목이라고는 없었던 독일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군을 가장 어리석은 방법으로 휘둘러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이 조금 더 영리한 기동을 선보였다면?
그래서 모스크바의 함락에 성공, 소련을 우랄 산맥 동쪽으로 일시적으로나마 내쫓아버리고, 그로 인해 독일의 패망이 소련군이 아니라 미군을 주체로 하는 연합국 군대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 손실을 벌충하기 위해, 소련이 소-일 불가침조약을 실제 역사에서보다 앞당겨 폐지하였다면? 그래서 관동군의 대소(對蘇)전투와 소멸이 몇 달 앞당겨지고, 일본 본토를 먼저 공략한 것이 소련군이 되었다면? 그로 인해, 연합군 일본 군정의 주체가 미군이 아니라 소련군으로 탈바꿈하였다면?
이러한 ‘역사에서 만약(What if in the history)’을 생각해 보자. 이렇게 소련이 일본을 먼저 완전히 점령해 버린 세계에서라면, 일본에는 미군정이 아니라 소련군정 사령부가 설치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실제 역사에서 일본이 미군 GHQ의 묵인 하에 치렀던 적군파 숙청(Red Purge)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의 공산주의자들은 멸종당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을 이끄는 주 세력이 되어버린다. 이 소설의 작중 역사에서, 소련 GHQ는 미군정하의 타국에서 벌어졌던 적군파 숙청이 결코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제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공산당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1946년의 일본 공산정부 임시 수립 및 신생 공산주의 일본국의 건국 준비를 승인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무조건항복으로부터 정확히 3년 뒤,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것과 같은 날, 작중 역사 속의 일본 열도에서는 ‘욱일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Rising Sun)’이라는 국호의 신생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이로써, 1940년대 말의 동북아시아에는, 공산당과의 내전이 한창이었던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를 제외한다면 오직 대한민국만이 자본주의 진영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남게 되었다.
한편, 작중의 역사에서도, 조선 남북은 분단되었다─김일성과 그 빨치산 일당, 박헌영과 그 조선노동당 계파세력의 연합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 1948. 9. 16. 0시를 기해 수립되었다. 실제 역사에서와 다른 점이라면, 헌법상의 영토 규정과 달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서로를 국체로 인정하고 처음부터 국제연합 동시가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으로서는 극동에 남은 유일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당장 북한과 무력을 겨룰 수 없음을 절감하고 현실을 우선 인정한 후 실력을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 정부야 어찌되었든 수년 내에 무력으로 격멸할 계획을 갖고 있었으므로 상대의 체제를 굳이 불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동란이 발발하였다. 실제 역사에서와 다른 점이라면,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 유일하게 남은 자본주의 국가로서 포기할 수 없는 나라라고 여겨졌다는 점이다. 실제 역사에서라면 최후의 자본주의 진영 극동 교두보가 되어야 했을 일본이 공산화되었기에, 자본주의 국가들은 극동의 유일한 방파제이자 교두보가 된 대한민국을 반드시 지켜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와 흡사하게 흘러간 동란의 초기 전개 이후, 욱일인민군의 참전과 중공군의 참전을 실제 역사에서와 달리 작중에서는 만주에 대한 맥아더의 핵폭격 실행으로써 확고히 방어해냈다. 결과적으로,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 당시, 대한민국은 실제 역사에서보다 넓은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낭림산맥을 양분하며 용천평야에서 원산 이북의 함흥평야 남쪽으로 이어지는 군사분계선을 설치하였고, 작중에서 휴전선이 수도와 지척이어서 매순간 안보위협을 느껴야 하는 쪽은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그 뒤로 체제대결이 본격화되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실제 역사에서보다 더 강력한 국가로 탈바꿈했다. 세계는 ‘라인 강의 기적’ 보다도 ‘한강의 기적’을 더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작중 세계에서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이 한국인의 자화자찬에 국한되지 않으며, 유럽 지역의 신문에서 먼저 언급되었다). 극동에서 오직 하나, 자본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국가였던 대한민국은 최선의 생산기지로서 거듭났다. 일본계 한국인 엔지니어 인력의 계승도 사실 도움이 되었다(과소평가되는 경향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1인당 GDP 1만 달러 선에는 1995년이 아니라 1981년에 이미 도달하였고(이 연도는 실제 역사에서는 일본이 1인당 GDP 1만 달러 초과액을 최초로 달성한 해이다), 1980년대 말의 대한민국은 이미 1인당 GDP 2만 달러 후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1985년에는 극적으로 대한민국과 소련의 국교가 수립되었고(실제 역사에서보다 5년 일렀다), 경협차관 40억 달러(실제 역사에서는 30억 달러였다)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소련이 파국을 향해 가면서 결과적으로 불곰사업이 재현된다. 1차 불곰사업은 작중 역사에서는 10년 먼저 진행되었고, 규모가 더 컸으나 육군 장비의 도입에 국한되었다는 것은 같았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는 2차 불곰사업에서 들여온 항공무기체계가 작중 역사에서는 1차 불곰사업에서 동시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보다 가팔랐던 공산진영의 쇠퇴가, 작중 역사에서는 뜻밖의 전화(戰火)를 지피게 된다. 소련은 너무 빨리 경제적으로 쇠락했다. 자본주의 진영과 밀무역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던 공산진영은, 심지어 자본주의 진영의 선봉 국가들이 공산진영의 선봉 국가들과 벌이던 국지전에서 거의 대부분 패배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는 더더욱 소련인들의 민심으로부터 이반(離反)하였다. 그 와중에 소련이 1991년 초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면서(실제 역사에서는 1998년에 러시아가 선언하였다), 불곰사업의 진행이 중단된다. 소련은 도저히 대한민국의 차관을 상환할 수 없는 지경이었고, 결국 고르바초프는 실각의 빌미를 만들고 말았다. 겐나디 야나예프는 성공적으로 쿠데타를 완수했고, 권좌에 오르자마자 보리스 옐친을 쏴죽여 버렸다. 그 후, 소련은 휘하에 있다가 소련에서 탈출하려고 하던 여러 지방 공화국들의 독립운동을 억누르고, 마침내 최후의 결단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 진영과의 냉전이 지속된다면 공산진영은 패배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소멸한다. 여기에는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소련을 필두로 한 일국사회주의의 확산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여기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소련은 북한의 김일성주의로부터 상황 타개의 단서를 얻어낸다. 김일성주의(a.k.a. 주체사상)란, 사실 대단히 모호한 수식어의 복합체로 그들의 ‘수령’을 국체(國體)가 하나 되어 옹위하자는 메시지를 억지스럽게 책 한 권 분량으로 불려 놓은 종이 쓰레기 속의 이론에 불과했다. 그러나 김일성주의가 지닌 단 한 가지의 강력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적어도 김일성주의가 미치는 범위 내에 한해서는, 모든 경제논리를 무시하고 국체를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가를 최소한의 이성조차 포기한 광신과 세뇌의 논리로 지탱해야 한다는 선언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야나예프의 소련은 수령제를 도입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일성주의의 북한이 보여주는 통치체제의 견고함은 본받고자 했다. 적을 쓸어버리고, 선군정치로 국내를 단속하며, 공산당의 일당제 집권체제 하에서 모든 인민이 당원이 되고 또 당의 뜻에 따라 국가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소련의 방식이 아니라, 북한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하여 자본주의 진영에 대해 완전히 패배하더라도 결코 국가의 소멸은 자연발생하지 않도록. 그들은 공산진영 국가의 자연소멸을 막기 위해, 번영할 수 없이 그저 어떻게든 명줄을 이어가는 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념의 존속을 위해 체제의 성질을 변혁한 것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서유럽에서 무색해졌을 때 레닌이 나타나 농업국 러시아를 억지로 소비에트화했을 때 이미 발생했던 사건이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사회주의적 국제주의가 제3세계의 후진국에서 무색해졌을 때 스탈린이 나타나 소련을 공업국이자 세계 유일의 ‘막강한’ 공산주의의 요람으로 변화시키면서도 일으켰던 사건이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는, 소련의 몰락과 해체를 목도한 북한이 공산진영의 쇠퇴의 물길을 막으려 헌법에서 ‘사회주의’를 솎아내고 ‘주체사상’만을 남겨 기괴한 정치체제로 스스로를 개조했을 때에도 발생하였던 사건이다. 그것이 작중 역사에서는, 공산진영 전체에서 소련을 필두로 벌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눈과 귀를 닫기로 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얼굴을 거세게 후려치면, 가리운 눈꺼풀 안쪽의 암흑이 핏빛으로 붉어지리라 믿었다.
공산진영 전체가, 1991년 말, 결사체를 이루었다. 그들은 결단한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진영을, 이 최후의 결단을 시행하며 완전히 먹어치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구의 땅 위에 남은 한 톨의 자본주의도 없앨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체계를 부식시키는 외부의 부와 번영의 물결이 그치리라. 그때에 이르러, 통일된 공산진영이 완전한 내부로부터의 풍화(風化) 작용으로 인해 바스라지더라도, 그들은 한때 유럽을 배회했고 소련에서 배회했으며 이제 유라시아를 넘어 전 지구를 배회하고자 하는 공산당의 유령 앞에서 동지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욱일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극동의 전선에서 선봉에 서는 역할을 배정받았고, 은밀히 군사연합을 건설했다. 한때의 피지배자와 한때의 지배자가 같은 이념에 물들어 타국의 부를 삼키려는 이 사악한 동맹은, 조선반도 전역을 장악하여 공산주의의 영원한 승리의 길에 앞장서고자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는, 자신들이 조선반도 전역을 장악하여 통일 공화국 수립을 실현할 것을 염원하는 바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현재,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은 헌법상의 옛 수도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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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헌법’이 1972년 제정되기 전까지, 북한의 수도는 명목상 서울이었다. 조선의 민족국가 수도로서 정통성을 가진 한성(漢城) 지역을 획득하지 않으면 조선 계승의 명분이 확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도 북한의 수도는 엄밀히 말해 서울이며, 다만 ‘사회주의헌법’의 대체조항이 평양을 “혁명의 중심도시”로 지정함으로써 암묵적으로 실질수도로 취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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