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원봉 선생님을 아십니까?

in #kr7 years ago

안녕하세요~ 유시진입니다!!!

첫 포스팅인데, 무엇을 적으면 좋을까 싶었는데 한국사 강의를 듣던 중에 올리면 좋겠다 싶은 분이 생겨서 이렇게 적게 되었습니다.

저는 역사계열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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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혹시 김원봉 선생님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이름은 모르더라도 영화에서 한번쯤은 봤던 인물인데요~

흥행이 많았던 '암살'에서 조승우씨가 맡은 역할, '밀정'에서 이병헌씨가 맡은 인물이 김원봉선생님입니다.

김원봉 선생님의 호는 약산 이시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시며 의열단을 창설하여 항일 무력투쟁을 전개하셨던 분입니다.

이 분의 현상금이 얼마인지 혹시 아십니까??

그 당시에 100만원의 현상금, 지금 가치로는 약320억입니다. 참고로 김구 선생님이 그때 당시 현상금이 6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우리나를 위해 애쓰신 분인데 김구선생님은 아는데 왜 김원봉 선생님은 모를까..?

그 이유가...김원봉 선생님이 1948년 김규식,김구 선생님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1948년 4월 월북을 하셨고,

[그 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그 후 1952년 5월 노동상, 1956년 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김일성(金日成) 비판을 제기한 옌안파[延安派] 제거작업 때 숙청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원봉 [金元鳳] (두산백과) ]

북한의 정치가가 되어 우리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힘쓰셨던 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겁니다.

참으로 안타깝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애쓰셨던 분인데, 북한에서도 한국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한국사 강사님의 말을 인용하면, 근현대사 초기에는 김원봉 선생님의 이름조차 책에 없었다고 합니다

색깔론 때문에 정치적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알아야할 분을 알지 못하는건 안타까운 사실인거 같습니다.

제가 이 포스팅을 하게된 이유가 김원봉 선생님을 모르는 분들이 있으면 알려드리기 위함도 있고, 더 가슴쓰린 이야기가 있어 적게되었습니다.

김학봉씨는 11남매(9남 2녀) 가운데 첫째인 약산과는 무려 34살 터울이어서 약산과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약산이 월북(1948년)하기 직전 약산을 두 차례 본 게 만남의 전부라고 김씨는 기억했다.

만남은 짧았지만 사회주의 성향을 띤 약산의 활동과 월북 전력은 김씨와 그 가족에게 길고도 가혹한 세월을 예고했다.

김씨는 약산이 월북하기 직전인 부산 경남여고 재학 때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약산의 행방을 추궁하던 경찰은 교복 차림의 김씨 손·발을 묶은 채 얼굴에 축축한 수건을 얹은 뒤 몇 시간 동안이나 물고문을 했다. 기절하면 뺨을 때려 깨운 뒤 고문을 반복했다.

약산이 월북한 뒤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6·25 전쟁 발발 직후에는 '불온분자'라는 이유로 밀양의 한 견직공장에 구금당했다.

김씨는 굶기를 반복하다가 휴전 무렵 간신히 풀려났지만, 비슷한 시기 끌려간 용봉·봉기·덕봉·구봉 등 오빠 4명은 모두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뜨개질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잇던 김씨는 휴전 직후 독립운동을 한 교육계 인사의 도움으로 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김씨는 "다행히도 생활은 점차 안정됐지만 바깥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도 가족사는 입도 뻥긋 안했다"며 "내가 당한 이야기도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주목되겠다 싶은 건 일절 입 다물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김씨는 2000년대 들어 북방외교 등 영향으로 지역사회에서 약산의 활약상을 알리려는 움직임이 가시화하자 마음을 바꿨다.

김씨는 2001년 북에 있을 약산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면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며 언론에 처음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이어 2005년에는 서훈을 신청하는 등 '약산 알리기'에 나섰다.

그러나 약산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국가보훈처 심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서훈 신청은 번번이 좌절됐다.

김씨는 "온 천하 사람들이 다 아는 독립운동, 항일운동한 것, 그것만 인정해주면 얼마나 고맙겠느냐. 죽기 전에 큰 오빠 서훈 받아서 '좋은 일'이 생겨야 할 텐데…"라며 다시 눈물을 보였다.

 출처: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8/14/0200000000AKR20150814042300052.HTML

우리나라를 위해 애쓰셔던 분들의 가족들이 왜 고통을 받아야할까요??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제 글을 읽는 분들은 오늘날 배불리 먹고, 편히 잘 수 있음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글을 너무 길게 적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편집이 있어서 글을 읽으실때 흐름이 안맞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부족한 글이고, 틀린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바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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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게시하도록 노력할께요!!

하이고... 안타깝네요. 억울한 누명이 빨리 고쳐졌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안타까운거 같습니다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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