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오후]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면? 둘을 다 알아도 그 사이를 모르면?- 김광규의 <생각의 사이>

in #kr6 years ago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 김광규,「생각의 사이」,『안개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2018, 53-54쪽.

<생각의 사이>는 김광규 시인의 첫번째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 1979)에 나오는 작품입니다. 이번에 시선집이 새로 출간되면서 시인이 스스로 선택한 200편 작품 중 하나로 <<안개의 나라>>에 실려 있습니다.

알쏭달쏭한 이미지와 수사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김광규 시인처럼 단정한 언어로 시를 쓰는 시인도 있지요. 이 시는 우리에게 '사이'의 가치, '과'의 철학 같은 것을 선사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업으로 삼은 일에만 몰두하면 세상이 잘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죠. 여러분도 아마 경험해보셔서 알 겁니다. 특히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을 부정하면서 하는 말 중에는 '사이'가 배제된 발언이 많죠. 이를테면 '그 일은 내 소관이 아니다. 나는 이것만 했다.' 같은 말 말죠.

부모와 자식이 서로 자기 주장만 하면 참 살아가기 힘들어지죠. 그럴 때는 부모와 자식의 '사이'를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너는 또 어떤 사람인가만을 생각하기보다는 너와 나 사이는 어떠한가, 어떻게 되고 싶은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추상적인 개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가 우선이냐, 평등이 우선이냐, 성장이 우선이냐, 분배가 우선이냐, 어느 것이 옳으냐 라고 묻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사이의 무수한 가능성을 묻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봅니다.

수련-스티밋.jpg

  • 수련도 수련만 놓고 보면 아름다울까요? 연못의 물과 그 물이 비친 하늘과 그 주변의 나무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그 사이에 아름다움이 놓여 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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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글이 묻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보팅과 팔로우 하고 갑니다!

용욱님, 보팅, 팔로우, 그리고 무엇보다 제 글을 읽어주신 것 감사합니다! '멋진 글'이라는 부끄럽네요. 꾸 준히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정도 퀄리티의 글을 꾸준히 써주실 수 있다면, 스티밋은 @witism님의 기여를 충분히 알아줄 플랫폼입니다. 계속해서 만나뵙길 기대합니다!

요즘 정말 많은 분들이 짱짱맨 태그를 사용해주시네요^^
행복한 스티밋 ! 즐거운 스티밋!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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