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오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나의 투쟁은>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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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으면 거대한 뿌리를 가진 나무가 떠오릅니다.



나의 투쟁은
그리움에 몸을 담아
나날이 방황하는 일.
그러다가 억세고 드넓게
수없는 뿌리를 뻗치며
인생의 깊은 곳을 파고든다.
그리고 고뇌를 뚫고
멀리 인생의 외부로 성숙하는 것,
멀리 시간을 벗어나!

- R. M. 릴케, 「나의 투쟁은」, 『사랑이 있는 풍경』, 손재준 옮김, 정음사, 1988, 43쪽


‘나의 투쟁’하면 단박에 콧수염을 기른 독일의 전쟁광 겸 독재자가 생각나지요. 그렇지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런 ‘나의 투쟁’도 있습니다. 앞엣것이 선혈이 낭자한 동물적 감각에 기초한 것이라면 뒤엣것은 “뿌리를 뻗치며” 파고드는 이미지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식물성의 저항’을 바탕으로 합니다. 식물성의 저항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자리에서 자기를 확장하는 안간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 시에서 시인이 벌이는 ‘나의 투쟁’은 전쟁광이나 독재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지요. 그러나 그 치열성에서는 그에 못지않습니다. 위의 시에 나온 투쟁의 여섯 단계는 살펴볼까요?

  1. 그리움에 몸을 담기
  2. 나날이 방황하기
  3. 억세고 드넓게 수없는 뿌리를 뻗기
  4. 인생의 깊은 곳을 파고들기
  5. 고뇌를 뚫고 인생의 외부로 성숙하기
  6. 멀리 시간을 벗어나기

1)은 왜 투쟁입니까? 어느 시인은 ‘나는 천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이 있다’고 호언했습니다. 그만큼은 아닐지언정 몸을 푹 담을 만한 그리움의 폭과 깊이가 없다면 어찌 방황을 할 수 있겠어요? 방황을 할 수 없는데 어찌 시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2)에 대해서는 괴테 선생이 이미 이렇게 대답한 바 있습니다. “노력하는 한, 인간은 방황한다.” 이 말을 뒤집자면 방황하지 않는 인간은,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죠.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목적은 아니죠.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언젠가는 갑판이 썩어 들어가서 항해를 할 수 없게 됩니다.

3)에 이르러 들뢰즈의 ‘리좀’ 운운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읽기라고 볼 수 있지만 너무 어렵게 읽어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 릴케는 하늘로 뻗는 가지의 상상력이 아니라 땅속 깊이 파고드는 뿌리의 상상력으로 기운 것일까요? 가지와 뿌리는 모두 뻗어나가지만 그 대상 공간은 전혀 다릅니다. 허공을 향해 뻗는 가지를 막는 것은 없지요. 가지는 하늘과
더 가까워질 뿐입니다. 하지만 뿌리는 어둡고 막힌 공간을 뚫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4)의 인생의 깊은 곳이란 곧 ‘어둡고 막힌’ 어느 구석을 자연스럽게 연상케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더라도 어둡고 막힌 어느 대목에서 멈칫거리게 마련이지요. 시인의 투쟁은 바로 이 지점을 뚫는 데 있습니다. 등을 돌려 나오고 싶은 그 어둡고 꽉 막힌 곳, 즉 자신이 자물쇠를 채워버린 그 견고한 문을 시인은 왜 부숴버려야 할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인생의 외부로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5)에 이르러 우리는 하나의 시적 정의(poetic justice)를 얻게 됩니다. 성숙이란 고뇌를 뚫고 인생의 외부로 나아가는 것. 인생의 외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수많은 인생행로 중에서 자신이 걸은 길 바깥을 사유하는 것인가요? 쿤데라가 언급했듯이 생은 다른 곳에 있다? 이성복 시인은 어느 시편에서 이런 아름다운 구절을 들려준 바 있습니다. 비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으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내 삶을 살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저도 어느 날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순간 우리는 인생의 외부로 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군요. 인생의 외부를 온갖 번뇌를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고 누군가 얘기한다면 “정답입니다! 참 모범생이시군요.”라고 맞장구 쳐줄 테지만 저는 ‘해탈’보다는 이성복의 저 ‘느낌’이 더 와 닿습니다.

6)은 더 어려운 일이죠. 인생의 외부로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시간을 멀리 벗어나는 것입니다. 찰나의 번뇌가 네온사인처럼 반짝거리는 이 삶 속에서 억겁의 시간도 모자라 그 시간 자체를 벗어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요? 그러므로 시인의 투쟁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투쟁입니다. 이 영속적인 패배 속에서 시는 전사한 병사처럼, 아니 짧은 개화 뒤 떨어지는 꽃처럼 쌓입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아니 떨어진 꽃잎들을 사뿐히 즈려밟으며 앞으로 앞으로 가는 것이 시인의 투쟁이라고 하겠습니다. 승패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멀리 시간을 벗어나기를 꿈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해볼 만한 ‘나의 투쟁’이지요.

시에 대한 가장 좋은 감상은 시로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또 저 나름대로 <나의 투쟁>을 다짐해봅니다.

오, 나는 그 누구도, 그 어디도 정복하기를 꿈꾸지 않았노라.
오로지 이 비루한 삶과 시간 바깥으로만 눈길을 주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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