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운이 좋은 00이다.'

in #kr7 years ago

서르니일기, ray, 서르니.jpeg

[서르니일기, 열 일곱 번째 이야기]
'나는 참 운이 좋은 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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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7
오랜 만에 누나를 만났다.
확실히 결혼해서 출가하니, 얼굴보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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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그 동안 너무 가까워서 몰랐던 감정을 느낀다.
고마움, 소중함, 애틋함 같은 감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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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같이 있으면 그 감정은 금방 사라진다ㅎㅎ..일종의 진눈깨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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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도전하고, 부딪혀 나가면서
눈앞의 덩쿨들을 헤쳐나가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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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헤쳐나가는 길 앞에 목적지가 있는지,
아니면 낭떨어지가 있는지 몰라 두려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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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감정을 털어 놓을 곳이 많지 않아,
그게 또 힘들고 외로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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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럴 때 누나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을 다 털어 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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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도 하고, 쓴소리도 하지만,
그게 참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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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난 언제나 누나가 있어서
해보고 싶은 거 다하면서 자랄 수 있었다.
힘든 건, 누나가 대신 다 해주면서 방패막이가 되어줬고,
내게 꼭 필요한 것이란 생각이 들면 부모님도 설득시켜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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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고3 수능시험이 끝나고,
처음으로 만화책과 비디오를 빌려주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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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나는 겨울방학이랍시고,
매일 만화책방에 들려서 하루에 만화책 20권씩 빌려가곤 했다.
인상은 무섭지만, 속은 넉넉하셨던 사장님께서 만화책 빌려보라고 대여비도 면제해주셨다고
신난다고 매일매일 누나가 일할 때 가서 만화를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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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추워서 오뎅과 계란빵이 잘 팔렸던 그 해 겨울이 지날 무렵,
누나는 나를 데리고 덕이동 로데오 거리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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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열 아홉, 고사리 손으로 힘들게 번 첫 월급이었을텐데,
그 돈으로 중학교 수학여행가는 동생 입으라고 '패딩잠바(점퍼따위 몰랐던 시절)'를 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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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불고, 말도 안 듣던 동생이었는데도,
누나는 그렇게 언제나 동생을 먼저 생각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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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누나가 있는 나는 참 운이 좋은 '동생'이다.
모든 것을 다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누나가 있어서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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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늘 나를 보며 부르던 노래가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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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곱슬머리 개구쟁이 내 동생~
내 동생 곱슬머리 개구쟁이 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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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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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부를 때는 꿀돼지
엄마가 부를 때는 두꺼비
누나가 부를 때는 (왕자님) ← 생락됨
어떤게 진짜인지 몰라 몰라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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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물보다 진한 피를 만나고 온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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