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단편소설] 사라진 여자 #3

in #kr3 years ago

K가 말해준 그녀의 집은 망원동의 뒷골목에 있는 다가구 주택이었다. 이사를 갔다고는 하지만, 그 집 어딘가에서 그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K는 그녀가 그 집에 산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몇 호에 사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당연했다. 한번도 집에 들어갈 일이 없었으니까 호수까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확히 몇 호에서 살았는지를 확인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금세 밝혀졌다.

그녀가 종적을 감추고 흔적을 지우기로 결심했다면, 아마도 미리 이사를 결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변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을 것이고. 그걸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산 곳이 젊은이들이 혼자 사는 원룸 구조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다가구 주택에서만 최근 한 달 사이 세 건의 이사가 있었다. 그녀가 거처를 옮긴 건 아마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부동산 사장에게 약간의 돈을 주니 집을 내놓은 세 사람의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최진수, 박유경, 김희원. K가 알려준 그녀의 이름은 거기 없었다. 정말 그녀는 여기에서 살기는 한 것일까?

이튿날 K를 만나 이런 얘기를 했더니 K는 예상대로 당혹스러운 표정에서 한참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입을 연 건 20분 정도가 지나고 내가 질문을 던진 뒤였다.

“그녀가 거기 살았던 건 분명한가?”
“분명하지. 그 집 현관으로 매번 들어갔으니까.”
“들어가서 몇 층으로 올라가던가?”
“그건 몰라. 나는 늘 차 안에서 작별 인사를 했어. 자네도 가봐서 알다시피 차에서 내려 50미터 정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집이라, 현관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만 볼 수 있었지.”
“현관에 키패드가 있었어. 그렇다면 그녀는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일세.”
“그러니까 말이야. 거주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비밀 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겠나.”

퍼즐의 첫 조각부터 들어 맞지 않는 상황에 대해 나 역시 K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이런 경우엔 더 많은 기본 정보를 파악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자네가 알고 있는 그녀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줘야 하겠어.”
“이를테면?”
“그녀를 집 말고 다른 어느 곳에 데리고 간 적이 있나? 그녀와 관련된 장소 말이야.”
“단 한 번도 내게 다른 어느 곳을 가자고 한 적이 없네. 그녀는 언제나 내가 퇴근길에 만났고, 함께 저녁을 먹은 뒤 내 집에 갔지. 생리 때를 빼면 사흘에 한번 쯤은 섹스를 했어. 그리고 늘 10시쯤 집으로 데려다 주었지.”
“그렇다면 두 사람은 주로 어디서 저녁을 먹었나?”
“회사 근처야. 상암동에서 저녁을 먹었지. 그날그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서로 제안을 하고 매일 저녁 다른 식당을 찾아갔어. 물론 가끔 같이 장을 보고 들어와 집에서 요리를 해 먹은 적도 있었고.”
“그녀는 직장이 없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망원동에서 상암동까지 지하철을 타고 자네를 보러 왔겠군.”
“아니야. 그녀는 버스를 탄다고 했네. 6시에 퇴근하면 늘 회사 앞에서 날 맞았네.”
“그녀가 버스를 탄 건 확실한가?”
“그녀가 버스에서 내린 걸 본 적은 없네. 다만 그녀가 그렇다고 얘기해서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그녀가 어떤 교통수단으로 이동했는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아직은 모르네. 다만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듣고 싶을 뿐이야.”

그와 얘기를 하다가 나는 그녀의 외모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K에게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몇 장 달라고 요청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진이 다 없어졌어. 그녀와 찍은 사진이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었는데, 남김 없이 삭제되어 있었네.”
“누군가 고의로 사진들을 삭제했다는 얘기인가?”
“그녀가 지운 것일까? 도대체 언제?”
“지금 정황으로 봐선 그녀는 사라지기로 결심을 하고 차근차근 흔적을 지운 것 같아.”
“왜 그랬을까?”
“글쎄, 그건 자네와 그녀의 관계이니 내가 뭐라 말할 수 있겠나. 아무튼 그녀가 실제로 그 집에서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어.”
“그녀가 나를 속일 이유가 뭐가 있겠나? 사는 집을 속인다는 건 나로선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야. 사진은 도대체 왜 지운 거지?”

그런데 이렇게 퍼즐을 짜맞추다 보니 K의 인식에도 뭔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자네는 그녀가 이사를 했다고 했지?”
“그렇지. 내가 찾아갔을 때 이사간 뒤였어.”
“그걸 어떻게 알았지?”
“뭘 말인가?”
“그녀가 이사를 했다는 걸 말이야. 자네는 한번도 그녀의 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고, 단지 현관 안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보지 못했는데.”

잠시 주춤하던 그가 말했다.

“말했잖은가. 나는 이틀간 꼼짝 없이 그녀의 집 앞에서 서 있었거든. 그런데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어.”
“‘이사를 갔다는 게 분명할 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자네는 믿고 싶은대로 믿은 것이군. 그건 팩트가 아니라 편리한 해석이지.”
“합리적 추론이기도 해. 그렇지 않다면 왜 그녀가 이틀동안이나 자기 집에서 나오지도 들어오지도 않았을까.”

K는 처음 나를 만나러 왔을 때보다 더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아무튼 일단 돌아가 있으라고 말했다. 거주지의 실체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다음 단계는 전화 번호라는 실마리였다. K가 알려준 그녀의 전화 번호는 통신사에서 일하고 있는 지인을 통해 등록자 이름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런 정도의 개인 정보를 빼내는 건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에겐 식은 죽 먹기다. 물론 이런 경우를 대비해 “망원”이라고 부르는 소스 제공자들을 평소 잘 관리하고 있어야 한다.

예상한대로였다. 등록자는 그녀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다른 사람 명의의 휴대폰을 사용했다는 말인가? 혹시나 해서 최근 이사를 한 세 명의 이름과 비교해 보았다. 일치되는 이름은 없었다.

이쯤되면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그녀의 이름도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K가 매일 들렀던 망원동 집에서 살고 있지 않았으며, 사라진 뒤 K가 자신을 찾아낼 가능성을 주도면밀하게 차단했다.

나는 내가 얻은 몇 개 안되는 실마리를 좀더 파보기로 했다. 일단 거주지. 그녀가 망원동에 실제로 살고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굳이 그 집을 가짜 집으로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눈발이 흩날리는 늦은 오후에 망원동 다가주 주택을 다시 찾았다. 키패드 비밀 번호를 누르지 않은 상태에서 유리 현관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았다. 우편함이 보였다. 동네 중국집의 전단지가 각호의 우편함마다 꽂혀 있었다. 외부인이 우편함에 전단지를 꽂아 넣을 정도면 키패드 비밀번호는 대단히 단순하다는 얘기다. 누구라도 쉽게 열 수 있을만큼. 나는 # 버튼을 누른 뒤 무심코 1.2.3.4를 차례대로 눌렀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원룸촌의 현관문 비밀 번호는 이토록 허술하다.

4층 구조의 건물이었다. 1층은 주차장, 2층부터 4층까지, 총 3개 층에 원룸이 모두 12개 배치되어 있다. 어느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왜 하필 이 집으로 들어왔으며, 만약 여기 살고 있지 않았다면 K가 돌아간 직후 다시 나와 어디로 갔냐는 것이 중요하다. CCTV도 설치되지 있지 않아 그녀가 이곳으로 돌아와 어디로 갔는지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 4층까지 올라갔다.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이 따로 있었다. 옥상 문을 열고 나갔다. 일반적인 다세대 가구의 옥상이었다. 각 세대에서 처분하기 곤란한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놓여 있었다. 이 건물은 현관으로 통하는 골목 쪽을 빼고 삼면이 다른 건물과 붙어 있었다. 오른쪽 면의 건물은 한 층이 더 높았다. 그런데 거기 쪽문이 하나 보였다. 만약 내가 저 쪽문을 열고 옆 건물로 이동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충분히 건널 수 있는 거리였다. 혹시라도 하는 심정으로 나는 쪽문의 손잡이를 잡고 당기고 밀어 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내가 무슨 상상을 한 거지? 나는 그녀가 이 쪽문을 통해 다른 건물로 이동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여하튼 만약 옥상에서 다른 건물로 옮겨 갔다면 이 쪽문 말고는 통로가 없다.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 눈발이 더 굵어졌다. 다세대 주택 바로 옆 건물로 몇 발자국 더 걸어갔다. 5층 건물이다. 여긴 다세대 주택이 아닌 게 분명했다. 사무실 용으로 쓰이는 상업용 건물이다. 현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또 다른 불투명 유리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키 카드도 아닌 지문 인식으로 열리고 닫히는 문이었다. 보통 이런 건물에선 사무실 내 직원과 통화를 하거나 벨을 설치해 놓기 마련이지만, 이 곳은 그것도 없었다. 지문 인식기만이 유리문 옆 벽에 붙어 배타적인 차가움을 더하는 파란 빛을 내뿜고 있다. 들어갈 방법은 없다.

바깥으로 나와 일단 현관 옆에 붙어 있는 건물 주소를 휴대폰으로 찍었다. 어떤 업체가 입주해 있는지 알아볼 참이었다. 그녀가 거주했던, 아니 매일 밤 10시가 넘어 들어갔던 다세대 주택의 옆 건물에 도대체 무슨 실마리가 있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회의감이 스쳤다. 그러나 이런 경우엔 직감을 믿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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