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과 광기의 사랑(Feat. 폭풍의 언덕)

in #kr7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남양주 포병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소다이저 입니다!

원래였으면 운동 포스팅을 올리려고 했는데.... 요즘 재밌게 푹 빠져서 읽고 있는 소설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에 대하여 포스팅을 하려고 해요!

그 소설은 바로 영국의 여성작가인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소설 제목에 대해서 한번씩은 들어봤을꺼라고 생각이 드네요^^)

캡처.PNG

이 소설은
영국의 여성작가인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로 처음에는 엘리스 벨(Ellis Bell)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습니다.
발표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그리 관심을 끌지 못했고, 내용이 지나치게 야만적이고 비윤리적인데다 등장인물 또한 흉칙하고 음산하다는 혹평을 받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기존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와 서정적이면서 긴박한 필치, 모순과 혼돈이 뒤섞인 인간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그 당시에는 이런 인간본성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문학 작품이 드물었습니다 ^^) 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영국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소설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캡처.PNG

<긴글이 되겠지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ㅎㅎㅎ!>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한다.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우리는 사랑 이라는 감정을 통해 희노애락을 느끼는 것이다. 인생사에 있어서 사랑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다룬다. 그만큼 우리들에게서 감성을 자극시키고 이입시키는 데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으뜸일 것이다.
이 글은 폭풍의 언덕 이라는 책을 기반으로 한다. 책의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사이의 사랑을 탐구하고 드러냄으로써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이뤄진 일들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논의할 것이다. 현실에서도 사랑으로 인해 다툼이 많이 일어나며 그로인해 이별도 빈번히 일어난다. 특히나 요즘 시대에서는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인스턴트식 사랑을 많이 하기에 폭풍의 언덕의 나오는 주인공들의 사랑을 통해 사랑에 대해 좀 더 깊은 고찰과 깨달음을 얻었으면 한다.
폭풍의 언덕은 언쇼 가문과 린튼 가문 그리고 히스클리프 이들을 중점으로 하여 얽힌 사랑의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히스클리프가 양자로 언쇼 가문에 들어와 성장하게 되고, 자라면서 캐서린 언쇼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캐서린 언쇼는 부자인 에드거 린튼을 선택해 결혼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히스클리프는 마음에 상처를 입고 떠났다가 부자가 되어 다시 돌아오는데 캐서린에 대한 자기의 마음을 포기 못한 채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캐서린을 가지려고한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그의 성장에서부터 비롯된 외적인 측면과 내적인 측면 그리고 캐서린과의 쌍방적인 측면에서 정리하고 바라봐야 할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언쇼씨가 리버풀을 여행하고 돌아오면서 데리고 온 집시소년으로 갈 곳 없는 고아였다. 언쇼가 문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받게 된 것인데 사실 이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은 어렸을 때 죽은 언쇼씨의 첫째 아들 이름이었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히스클리프가 뿌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뿌리를 가지고 삶을 산다. 각자 누구의 자식으로써 부모로써 연결된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히스클리프만이 이 책에서는 유일한 뿌리가 없는 사람으로 외부인이다. 이러한 점은 히스클리프의 내면적 성장에 있어서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동시에 미래에 히스클리프의 집착과도 같은 사랑을 설명하는데 있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히스클리프가 언쇼 가문에 들어오게 되면서 언쇼씨의 사랑을 차지하자 질투가 난 힌들리 언쇼는 히스클리프를 괴롭힌다. 히스클리프 또한 언쇼씨의 관심과 사랑을 이용해 힌들리를 괴롭히는데 가족애를 보이고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이용해먹으려는 히스클리프의 영약한 면이 돋보였다. 뿌리가 없다는 점과 집시생활을 통해 길러진 생존본능이 가족애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히스클리프가 부자가 되어 다시 돌아온 후 가정을 꾸리었을 때 자신의 자식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린튼가문과 언쇼가문의 재산을 독차지 하기위한 장기말로 쓰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히스클리프가 집에 들어오고 3년 후에 언쇼씨가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장남인 힌들리 언쇼의 무자비한 괴롭힘이 시작된다. 히스클리프는 천대받는 마부로 전락하지만 캐서린과의 사랑의 힘으로 버텨나간다. 그중에 캐서린과 단 둘이 멀리 숲으로 산책을 나가다 비가오자 그 둘은 드러시크로스 저택으로 비를 피하러 가게 된다. 드러시크로스 저택은 린튼 가문이 거주하는 곳으로 절제 되 있고 기품이 넘치는 귀족의 집이다. 캐서린은 드러시크로스 저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히스클리프는 그곳에서 쫒겨나게 되었다. 여기서 히스클리프는 캐서린과의 보이지 않는 다름을 내면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히스클리프가 근본없는 존재로 기품과는 거리가 먼 야생적인 존재라면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는 다르게 부자인 언쇼가문의 막내딸로 귀한 신분이며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내면적 차별은 히스클리프를 더욱 갈 곳 없는 곳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출구가 캐서린이었지만 그 출구 또한 자신과는 맞지 않다는 걸 느꼈기에 점점 소외감과 함께 비참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중에 캐서린이 린튼 가문으로 예의를 배우러 몇 달동안 지내고 온 후 다시 집에 돌아와 히스클리프를 만났을때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반가워하며 찾았지만 오히려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을 멀리하고 서먹하게 대하려 했다. 캐서린이 예의와 기품을 갖추고 오니 자기 자신과 더욱 비교되 자괴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태는 계속 지속되어왔고 히스클리프또한 캐서린을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하나 자기의 외면상의 추함이 다가가기를 망설이게 해온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캐서린이 자기의 가정부인 넬리 딘과 이야기를 하던 중 히스클리프가 우연히 듣고 있다는 걸 모른 채 “비천한 신분의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내 삶의 수준이 격하될 것이 뻔하니 그가 떠나서 돌아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무심코 말하게 된다. 물론 이말은 캐서린이 외면적 물질적 부를 중요시 하기에 내뱉은 말이였지만 그 뒤에 이어서 한 히스클리프의 대한 진심어린 사랑을 말하는 것을 히스클리프가 듣지 못한채 오해한 채로 그 집을 벗어나 떠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심한 모순을 느낄 수 있는데 캐서린은 부자인 린튼가문의 아들 에드거 린튼을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 처럼 다르다고 표현한 반면 히스클리프를 자신과 같은 동일한 영혼이라고 표현했다. 즉 캐서린 역시 히스클리프를 사랑한 것은 틀림없으나 물질적 부로 인해 에드거 린튼을 사랑한다고 한 것이다. 물론 물질적 부가 항상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사실이다. 연애를 할 때에도 돈이 필요하고 어떤 소비적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다만 오직 물질적 부가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게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히스클리프는 부자가 되어 3년후 다시 돌아오는데 이때 그의 내면적 본성과 달리 그는 외면적으로 신사의 모습을 띤 채 돌아온다. 즉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린튼 가문이나 캐서린과 같은 절제되고 차분한 그러한 품위 있는 사람이 되어 온 것이다. 결국 이야기는 다시 히스클리프가 이미 유부녀가 된 캐서린에게 접근해 사랑을 나누는데, 캐서린또한 이미 결혼을 했으면서도 마음 한편에 히스클리프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캐서린은 히스클리프가 아닌 에드거 린튼을 선택했다. 비록 사랑보다는 물질적인 부를 선택했지만 캐서린의 선택에 어떠한 제지를 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나서도 다시 찾아온 히스클리프를 받아들여 그를 사랑해 하는것은 비도덕적이면서 주변을 위험으로 몰아가는 행위이다. 분명 소설속 당시 시대상으로도 일부일처제를 표방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클리프와의 사랑을 끝까지 이어가는 행위는 파렴치한 행위로 밖에 볼 수 밖에 없다. 정말 그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그와 자신은 똑같은 존재라고 하면서 에드거 몰래 서로 만나는 행위는 이념상으로는 옳지 못하다고 간주한다. 이성적, 도덕적인 면에서 보자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을 부정적으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관점에서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에나 나오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랑, 그러한 애절한 사랑을 겪어보지는 못하였지만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이 정말 그러한 종류의 것이라면 그들의 사랑은 정신적◦영혼적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에드거와 캐서린의 사랑은 물질적인 부를 위해 만나는 목적이 아닌 수단적 사랑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책 후반부에 언급되는 히스클리프의 말 “내 삶, 내 영혼과도 같은 그대가 없이는 난 살 수가 없다!”은 ‘땅 밑에 있는 바위’에 비유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랑이라고 하고, 캐서린의 에드거에 대한 사랑은 ‘숲의 나뭇가지에 있는 잎사귀’에 비유하여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랑은 변할 것이라며 진정한 사랑없이 에드거와 결혼하려는 캐서린에게 넬 리가 계속되는 반문으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려고 한다. 이 모습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란 시간이 흐른다거나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작가 자신의 사랑에 관한 철학을 표명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관점으로 보면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긍정적이면서도 매우 애절한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끔찍할 정도의 집착과 광기를 보이는 불편한 사랑이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절절한 사랑이다. 하지만 이 둘의 사랑을 운명적인 사랑, 즉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게 하도록 만든 작가의 몇몇 상징적인 요소들이 눈에 보인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어린시절 언쇼씨가 리버풀로 여행을 가려하기 직전에 자식들이 힌들리와 캐서린에게 무엇을 기념품으로 사다줄까 하고 물었던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힌들리는 바이올린을, 캐서린은 말채찍을 사달라고 했다. 그런데 리버풀에 갔다온 언쇼씨가 들고 온 것은 부숴진 바이올린과 말채찍이 아닌 히스클리프였다. 왜 하필 바이올린과 말채찍을 사달라고 했을까?, 그리고 왜 부숴지고 말채찍이 아닌 히스클리프를 데려왔을까 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상징적으로 관찰해보면 바이올린은 섬세한 악기기구로 힌들리의 정신적 상태와 미래를 상징한다고 본다. 히스클리프의 언쇼가문 입성과 함께 부숴진 바이올린처럼 힌들리 또한 점점 포악해지고 결국에 나중에는 도박과 술에 찌든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채찍은 말을 타는 사람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캐서린은 말을 타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러한 캐서린에게 말채찍 대신에 히스클리프가 왔다는 것은 결국 캐서린에게 있어 히스클리프가 중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히스클리프의 거칠고 야생적인 내면은 초원을 달리는 말과 같다고 볼 수 있고, 기품과 절제를 갖추면서도 동시에 변덕이 심한, 완전하지 않다는 점에서 통제를 가능케 해주는 말채찍과 같은 인물이 캐서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이 집착과 광기를 띠게 만드는데 일조를 했던 것은 배경적인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언쇼가문이 살아온 워더링 하이츠는 특이한 돌풍 현상이 나타나는 곳으로 폭풍이 이는 전체적으로 폐쇄적이고 음산하며 어두운 분위기를 조장한다. 메마른 황무지에 높이서서 원초 상태의 황량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워더링 하이츠는 격정적이고 광포하고 억제할 수 없는 원초적인 야성의 세계를 상징하는데 이 곳의 형성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히스클리프이다. 특히나 히스클리프가 집착과 광기를 보이는데는 살아온 성장배경이 영향을 어느정도 주었다고 본다. 이에 반대로 드러시크로스 저택은 숲이 무성한 골짜기 밑에서 평화로운 분위기를 조장한다. 부드럽고 고요한 세계를 형성하며 차분하고 절제되는 품위를 가진다. 워더링 하이츠가 야생을 대표한다며 드러시크로스 저택은 문명을 대변하는 곳으로 또한 물질적 부가 있는 곳을 상징한다. 대표적으로는 부와 함께 교양을 갖춘 에드거 린튼이 있다. 히스클리프와는 달리 드러시크로스 저택에서 살아온 에드거에서는 집착이나 끈질김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 히스클리프가 돌아온 시점부터 캐서린은 앓기 시작하다가 폐렴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채 히스클리프에게 용서를 구하며 사랑을 다시 재확인하게 된다. 숨을 거두는 날 “캐서린,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말했지? 그렇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영면하지 말고, 혼령이 되어 내 곁을 떠돌라!” 라며 캐서린의 영혼이 구천에 떠돌아 자기 곁에 머무르라는 저주를 내리는 히스클리프의 말 속에서 처절한 절규를 느낄수가 있다. 실제로 히스클리프는 나이를 먹어서도 캐서린의 영혼과 만나며 하루하루를 광기속에서 살아간다. 밤마다 히스클리프의 방을 혼령인 캐서린이 서성대며, 자신들의 추억의 장소인 폭풍이 부는 언덕을 거닐면서 영혼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분명히 절절하고 이보다 더한 사랑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사랑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그 속에서 보이는 광기와 집착은 이들의 사랑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그들의 사랑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보다는 우선 부를 선택한 캐서린의 선택과 그로인한 히스클리프의 복수와 집착은 결국 주변인들의 파멸을 불러일으켰다. 그 파멸은 자기 자신들까지 삼켰으며 누구하나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캐서린 사후 그녀를 보고 싶어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모습을 통해서 비이성적이면서도 그들의 사랑이 선이 없다는 걸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람을 사귈때 선을 어느 정도 둔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최종 선을 마음에 품고 다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목숨을 내다 바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보고 대단하다고 느끼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선이 없는 말, 자기 자신을 전부 내다 바치는 사랑을 하였다. 그렇기에 광기와 집착을 보이는 사랑과 자기 자신을 다 주는 절절한 아름다운 사랑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 두 개의 사랑은 종이 양면의 위치한 사랑으로 약간의 더함과 덜함의 차이만 있을뿐이지 근본은 같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 두 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필자는 그 차이가 배려심이라고 본다. 바로 이 배려심이 폭풍의 언덕 저자인 에밀리 브론테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한 것이다. 에밀리 브론테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사라질지 모르는 진정한 속성의 사랑이란 받기보다는 줄 수 있는,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베풀 줄 아는 사랑임을 소설 속의 어긋난 인물들의 사랑을 통해 독자에게 시사한 것이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모두 사랑을 주는 법을 모르는 인물들이다. 둘 다 누구에게서 배운 적이 없기에 주는 법을 모르고, 서로서로를 갈구하며 사랑을 얻으려고만 한다. 그래서 아름답고 배려하는 사랑이 아닌 광기와 집착의 모습을 띤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결국 모두의 파멸을 초래했고, 이기적인 마음이 얼마나 큰 고통을 불러일으키는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실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화하면서 삶은 더욱 각박해져가고 인심은 결핍되어갔다. 모두다 서로 가지고 얻으려고만 하지 남에게 아낌없이 무조건으로 무언가를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준다고 해도 의심을 하게 될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 그러한 세상에서 에밀리 브론테가 말한 사랑은 받는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본질의 깨우침은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있어 변화의 시초가 될 것이라고 본다.

에밀리 브론테가 엘리스 벨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을 당시에는, 그 음산한 힘과 등장인물들이 드러내는 야만성 때문에 반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그녀의 언니 샬롯 마저도 1850년에 출판된 소설의 서문에서 “어줍잖은 작업장에서 간단한 연장으로 하찮은 재료를 다듬어 만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혹평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한 폭풍의 언덕은 오늘날, 에밀리의 언니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와 더불어 애정의 섬세함을 내면화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폭풍의 언덕 의 제목에서 시사하고 있듯이,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는 어두운 분위기는 빗나간 애정의 극단적인 복수심과 증오의 표현을, 복수심과 증오심은 인간 내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폭풍을 대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운명적인 사랑의 주인공들’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이들의 성격에 잘 나타나 있으나, 지상의 사랑은 땅에 묻히고 마는 사랑으로, ‘사랑을 소유하기 위한 욕심’은 ‘집착’의 또 다른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과 증오’라는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폭풍의 언덕은 영문학의 3대 비극이자 ‘세계 10대 소설’로 꼽힐 정도로, 빛나는 감수성과 시적이고 강렬한 필치, 인간의 정열을 극한까지 추구한 예술작품으로, 깊은 비극성과 서정적인 심상과 깊은 연민과 사랑 및 인생에 대한 고통어린 해석으로 순수한 감동을 주는 걸작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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