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54: 아라한과 보살에 대해서

in #kr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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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54: 아라한과 보살에 대해서

아라한

아라한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일단 깨달음에 이르면 아직도 어둠 속에 헤매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는 자를 말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깨달음에 이른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실 아라한에 따르면 자비라는 위대한 생각도 또다른 형태의 집착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그대는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비 역시 하나의 관계다.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 또한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 또한 하나의 욕망이다.

아라한은 누구도 다른 누구를 도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남을 돕는다는 생각 자체가 애당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대는 오직 자신만을 도울 수 있을 뿐이다.

평범한 마음으로 보면 아라한들이 무척 이기적인 사람들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어떤 편견도 없이 바라본다면 그들 역시 세상에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남을 돕는 것은 남의 삶에 간섭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삶에, 그 사람의 생활 방식에, 운명에, 그의 미래에 간섭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들은 어떤 자비심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비는 그대를 집착의 세계에 묶어 두는 또다른 아름다운 욕망일 뿐이다. 이름은 다르다. 아름다운 이름, 그러나 여전히 마음의 욕망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래서 아라한은 깨닫는 순간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법도 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도 남을 돕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의 환희 속에 살아간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심이다.

고타마 붓다는 세상에는 아라한이 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들의 길을 하나야나 (Hinayana)라고 불렀다. 그것은 소승, 즉 작은 배란 뜻이다. 아라한은 큰 배를 만들어서 노아의 방주처럼 군중을 끌어모아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혼자서 자기 배를 타고 간다. 그 배는 두 사람도 탈 수 없다. 그는 홀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홀로 수백만 번의 생을 거듭하다가 홀로 우주의 근원으로 들어간다.

(펌) 오쇼의 달마어록 강의 중에서

아라한과 보살

철학쪽으로 대승에 속해있는 한국 출신이고 대승과 비슷한 기독교 복음주의에 속한 북미에 살고 있어서 당연히 제가 진리를 얻었다면 발견한 진리를 나누어 주는 자비, 사랑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제 안에는 아라한의 DNA도 있을 것입니다.

아라한과인 사람이 자신이 보살과인 줄 알고 자비를 나누던지 복음을 전하면 무진장 피곤하고 결과도 안좋을 겁니다. 반대로 보살과가 아라한과 처럼 생활하면 그것도 항상 부족한 마음이 들겁니다.

저는 당연히 보살과라고 아무런 꺼리김없이 생각했었는데 아라한의 DNA가 더 많은 것은 아닌지, 혼자서 생활해도 외롭긴 해도 보살처럼 생활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재미있는데.

지금까지 살면서 아라한과를 보면 괜히 심술을 부렸던 기억이 많은데 그것도 지극한 편견이었음을 달마어록강의를 읽으면 배웠습니다.

사랑에도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이 있을수 있고 그냥 지켜보는 사랑이 있을수 있음을 이제 겨우 이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나 공자가 보살과라면 노자와 소크라테스는 아라한과 인것 같습니다. 고타마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45년 동안 설법을 했지만 죽으면서 ‘나는 아무말도 안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보살과 아라한을 같이 경험했나 봅니다.

아난다 신드롬

고타마 붓다의 비서실장이며 45년동안 붓다의 곁을 같이한 붓다의 사촌형 아난다는 고타마 붓다가 살아있을때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촌형인 아난다에게 붓다는 자신의 죽음 후 24시간 안에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많은 불경은 ‘아난다는 이렇게 들었습니다’로 시작을 합니다. 이유는 붓다의 설법을 제일 많이 오래 들었기에 불경을 제작할때 아난다가 확인을 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붓다로부터 깨달음을 얻었지만 항상 곁에 있던 아난다가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 이유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고 자신이 붓다의 형이라는 관념이였다고 합니다.

나이도 몇살 위고 깨달음도 빨리 얻기 위해서 붓다의 비서실장을 청했지만 자신이 붓다의 형이라는 사실을 잊을수 없어서 결국은 붓다의 죽음 후에 깨달음을 얻습니다. 자아를 버리지 못하면 아난다 신드롬에 걸립니다. 자아를 못 버리는 이유가 집착일 겁니다. 자비심도 집착이라는 아라한…

능력이 모자라는데 베풀겠다는 것도 집착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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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외향적으론 보살인데... 속내는 아라한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지적질 하는 것 같아서 약간 조심스럽기는 합니다만, 오쇼가 남방상좌 불교에대해서 곡해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라한과를 얻는 과정에는 사무량심(慈悲喜捨)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승과 소승의 차이는 발원(發願)으로써 보리심의 있고 없음을 들수 있습니다. 대승의 보살도 수행은 '중생구제'를 하기위해서 깨달음(열반)을 얻는다는 것이지 열반이 목적이 아니거든요. 열반의 정의는 사실 번뇌(탐진치)의 소멸입니다. 따라서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게는 라는 생각이 없기때문에 이기심도 없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아라한은 번뇌를 완전히 소멸한 것이고, 보살은 중생구제를 위해서 번뇌를 조금 남겨둔 것인데 그래서 보살은 약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능동적인 것이지요. 이것을 발보리심이라고 표현하지요. 그렇다고 아라한이 자비심이 없다고 이해하는 것은 어찌보면 대승에서 소승을 비판을때 함부로 들이대는 잣대인것 같습니다. 남방상좌부 계열의 논서 아비담마, 청정도론, 그리고 니까야 경전을 본다면 절대로 저렇게 이해할수는 없다고 봅니다.

혹시 제 견해가 언짢으셨다면 미리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지만 아라한이나 보살에 대한 문헌적 이해가 바로 서지 않는다면 불교 내에서도 종파간의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불교 신자들도 곡해할 우려가 있고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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