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대해서: 아라한과 보살 (자비도 욕망이라고?)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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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해서: 아라한과 보살 (자비도 욕망이라고?)

고양이와 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멍청해서 모르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겁니다. 멍청한 놈을 팰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고 답답할 따름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들은 너무 주인들을 좋아합니다. 혼자 있을때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다가 주인만 나타나면 난리 부르스를 합니다. 적당히 했으면 좋겠는데 개란 동물은 오버를 좋아합니다.

조용히 하라는데 시끄럽게 짓고, 좋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자고 있으면 얼굴에 키스를 하고…하여간 손이 많이 갑니다.

대신 고양이는 독립적입니다 그렇지만 차게 느껴집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없다면 주인도 깡무시합니다.

고양이가 개와 다른 점

  •    몸을 스스로 청결하게 한다
    
  •    혼자 고독과 침묵을 즐긴다
    
  •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    애정표현이 감칠 맛 난다
    
  •    의견을 확실하게 제시한다
    

개는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몸 청결도 주인이 도와주어야 하고, 혼자서는 즐기지도 못하고, 과잉 충성을 하고.

사람도 개과와 고양이과가 있습니다. 개처럼 같이 하는 것을 즐기고 좋아하면서 혼자서는 외로워하고 대신 고독을 즐기는 듯한 고양이과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개과를 보살로 고양이과를 아라한이라 인정하신 것 같습니다. 자신 스스로는 보살로 생각하셨는지 단체생활을 하셨습니다.

아라한

아라한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일단 깨달음에 이르면 아직도 어둠 속에 헤매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는 자를 말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깨달음에 이른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실 아라한에 따르면 자비라는 위대한 생각도 또다른 형태의 집착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그대는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비 역시 하나의 관계다.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 또한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 또한 하나의 욕망이다.

아라한은 누구도 다른 누구를 도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남을 돕는다는 생각 자체가 애당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대는 오직 자신만을 도울 수 있을 뿐이다.

평범한 마음으로 보면 아라한들이 무척 이기적인 사람들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어떤 편견도 없이 바라본다면 그들 역시 세상에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남을 돕는 것은 남의 삶에 간섭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삶에, 그 사람의 생활 방식에, 운명에, 그의 미래에 간섭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들은 어떤 자비심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비는 그대를 집착의 세계에 묶어 두는 또다른 아름다운 욕망일 뿐이다. 이름은 다르다. 아름다운 이름, 그러나 여전히 마음의 욕망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래서 아라한은 깨닫는 순간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법도 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도 남을 돕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의 환희 속에 살아간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심이다.

고타마 붓다는 세상에는 아라한이 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들의 길을 히나야나 (Hinayana)라고 불렀다. 그것은 소승, 즉 작은 배란 뜻이다. 아라한은 큰 배를 만들어서 노아의 방주처럼 군중을 끌어모아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혼자서 자기 배를 타고 간다. 그 배는 두사람도 탈 수 없다. 그는 홀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홀로 수백만 번의 생을 거듭하다가 홀로 우주의 근원으로 들어간다.

보살

붓다는 아라한의 길을 인정했고 또 존경했다. 그러나 또한 이 세상에는 무한한 자비심을 가진 사람들이리 있음을 그는 간과하지 않았다. 그들이 깨달음을 얻었을 떼 그들의 첫번째 열망은 자신들의 기쁨을, 자신들이 발견한 진리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자비가 그들의 길이다. 그들 역시 심오한 진리를 갖고 있다.

이 사람들이 바로 보살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불러내어서 같은 경험 속으로 초대한다. 그들이 이쪽 강가에서 가능한 한 오래 기다린다. 길을 떠날 준비가 된 사람들, 안내가 필요한 삶들을 돕기 위해서다. 그 사람들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살은 피안으로 건너가지를 자꾸만 연기한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헤메는 눈먼 사람들을 향한 자비심 때문이다.

고타마 붓다는 확실히 서로 모순된 진리까지도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는 그 둘 다를 수용했다. 어느 쪽이 더 우월하고 열등한가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보살들은 아라한의 길에 반대해서 자신들의 길을 마하야나(Mahayana)라고 불렀다. 그 말은 대승, 즉 큰 수레, 큰 배라는 뜻이다. 저쪽은 작은 배다. 한심한 친구들! 저 혼자서 배를 타고 가다니! 그리하여 붓다가 죽은 후 2천5백년 동안 이 접근법 사이에는 끊임없이 갈들이 있어 왔다.

(펌) 오쇼의 달마어록 강의 중에서

자비도 욕망이라!

나는 고양이도 개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개는 귀찮아서 싫고 고양이는 차거워서 싫고. 고양이는 차겁지만 스스로 독립적이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삶을 삽니다. 적어도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친구들 중에서도 고양이같은 아라한과가 있습니다. 혼자서 놀다가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친구들입니다. 뭐를 하고 다니는지 알리지도 않고….

이기적이고 얄밎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멍청해서 옆에 친구들에게 민폐를 끼치지는 않습니다. 열밉다는 것이 죄는 아닌데

아라한은 누구도 다른 누구를 도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남을 돕는다는 생각 자체가 애당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대는 오직 자신만을 도울 수 있을 뿐이다.

평범한 마음으로 보면 아라한들이 무척 이기적인 사람들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어떤 편견도 없이 바라본다면 그들 역시 세상에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남을 돕는 것은 남의 삶에 간섭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삶에, 그 사람의 생활 방식에, 운명에, 그의 미래에 간섭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들은 어떤 자비심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비는 그대를 집착의 세계에 묶어 두는 또다른 아름다운 욕망일 뿐이다. 이름은 다르다. 아름다운 이름, 그러나 여전히 마음의 욕망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오쇼의 달마강의 중에서-

욕망이 나쁘다고 누가 그래?

만일에 자비가 없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이렇게 사회를 만들어 살지는 못했을 겁니다. 자비라는 아름다움이 우리 서로를 피곤하게 합니다.

도움을 주고 싶고 도움을 받고 싶고…살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라고 합니다. 회사를 다닌때도 일은 할만한데 관계가 어렵고 그렇지만 인간관계가 필요없었다면 회사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비가 없었다면 혼자서 하는 작은 일은 할수 있었겠지만 같이 하는 큰일은 힘들었을겁니다.

욕망이 있기에 인간들은 발전을 했습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 되였습니다.

자비가 우리를 귀찮게는 합니다. 가끔 필요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자비라는 욕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겁니다.

그리고 고양이와 개가 싸우면 대부분 개가 이깁니다. 덩치가 크기 때문이죠! 아무리 현명해고 지혜가 많아도 멍청한 놈이 돈 많고 힘 좋으면 당할 수가 없습니다.

아라한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욕망이 나뻐? 조금 오버해서 간섭하면 안돼! 가끔 피곤하기는 하겠지만 재밌잖아!

여기서 피곤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자비가 없어서 보살은 아닌데 욕망은 있으니 아라한도 아니고 도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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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출에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아라한 아라한에 대해 잘봤습니다.보팅해드려요:)

감사합니다

이벤트 참여 감사합니다ㅎㅎ
보팅 꾹 누르구 가용~^^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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