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한국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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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한국 불교

한국 불교

기원후 4세기와 5세기경 삼국 시대에 동진 시대(317-420)와 남북조 시대(439-589)의 중국을 거쳐들어온 종교로서 한국 민족과 더불어 자라온 중요한 종교 사상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1600여년의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국 불교는 토착화되면서 한국인에 맞는 한국적 특성을 지닌 종교 사상이 되었다.

한국 불교의 특성

삼국 시대에 전래된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국불교는 토착화되면서 한국인에 맞는 한국적특성을 지닌 종교 사상이 되었는데, 그 특성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 불교는 인도나 중국에서 분화되었던 사상을 융합하려는 통불교적 성격의 노력이 컸다. 이는 원효의 화쟁사상, 의천의 교관겸수, 지눌의 정혜쌍수의 사상 등에서 보듯이 교종에 속하더라도 선정 수행을 중시하고 선종에 속하더라도 교가의 공부를 경시하지 않았던 것에서 잘 나타난다.

둘째, 사상 체계를 요약하여 수행을 통해 자심(自心)을 밝히는 것을 중시하였다. 이는 원효의 일심사상, 신라말기와 고려초의 선종 구산, 고려 중기 이후의 오교 양종, 조선 시대의 선교 양종, 현대의 조계종의 출현, 성철의 돈오돈수 사상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잘 나타난다.

셋째, 위태로운 때를 당하면 불교에 의지하려는 생각이 깊었는데 호국불교의 사상적 명맥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호국불교의 사상은 자장의 불국토 사상, 불국사와 석굴암의 건립, 팔만대장경의성립, 임진왜란 때의 승병의 활동 등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 불교의 역사

한국의 불교는 1,600년 전인 삼국시대에 중국을 거쳐 들어온 사상으로서 한국민족과 자라온 중요한종교사상의 하나가 되었다. 삼국시대에 육상 경로와 해상 경로를 통해 전해졌다. 기록 상 최초의불교 전래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소수림왕 전 시기에 불교가 상당 부분고구려 각처에 퍼져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나라들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율령체제 정비와 그 궤를 같이한다. 불교는 도입된 이래 삼(사)국의 주요 통치 이념이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정치 이념이었던 유교와 함께 가장 강력한통치 이념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중요한 점(영적 청량제여야 하는 점)을 망각하고 권력화하여 타락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몰락으로 이끈 경향이 짙었고, 조선 초의 배불 숭유 정책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불교의 영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김수온 등의 건의로 이를 부흥시켰다.

남북조시대 신라 말기에 중국의 선종이 전파되었으며 고려 시대 이후 한국 불교는 선종을 중심으로한 통불교, 즉 선-교 양종의 통합 불교가 주축을 이루었다.

근세 이후 한국 불교의 주류는 선종이다. 해방이후 비구-대처분쟁이후 비구 종단은 대한불교조계종을 중심으로 정립되었고, 조계종은 현재까지 한국 불교의 대표 종단이다. 불교 대승 종단은 소의경전을 중심으로 나눌 수 있다.

원효 (元曉, 617년 ~ 686년)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 이름은 설사, 호는 화정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 백부논주, 해동법사, 해동종주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원효보살, 원효성사라 존칭되고, 화쟁국사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이나, 보통 한국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불린다.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이며, 한국불교 최초의 깨달은 스님, 한국 최초의대처승으로도 유명하였다.

하루는 마음이 들떠 거리에 나가 노래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듣고 그 뜻을 몰랐으나, 태종무열왕이 이를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라며 요석궁의 홀로된 둘째 공주—흔히 요석공주—를 짝되게 하니, 과연 공주가 아이를 배어 설총을 낳았다.

스스로 실계한 원효는 소성거사라 자칭하면서 속세의 복장을 하고 마을에 나다니다가 우연히 한 광대가 괴상한 박을 가지고 춤과 만담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에서 '무애'를 따라가 박의 이름을 짓고 〈무애가〉라는 노래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세상 사람 중 염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그렇게 컸다. 그러나 원효의 춤과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광대들이 생계에 지장 있음을 호소하자 그는 이를그만두었다.

원효는 불교 뿐만 아니라 도가와 유가에도 밝았고, 한비자와 상앙의 법가 사상에도 지식이 많았다. 특정한 스승 없이 영취산의 낭지, 고구려의 보덕, 항사사(현 오어사)의 혜공 등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원효는 당시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34세와 45세 때 의상과 함께 두 번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다.

두 번째 구법 여행 중 삼계유심의 원리를 깨달아 구법행을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 후 원효는 과부였던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설총을 낳고, 불교를 민중화시키고, 분열된 국민정신을 통합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원효는 당시 전하던 거의 모든 경론에 대해 주석을 하여 100여 종의 저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20부 22권뿐이다. 이 중 《대승기신론소》 2권, 《금강삼매경론》 3권, 《십문화쟁론》 2권 등은 원효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원효 사상의 핵심인 일미(一味) 화쟁(和諍)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원효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유식학이나 불교논리학 등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의상(義湘, 625년 ~ 702년)

고대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왕족 출신, 고승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작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으로부터 화엄종을 수학하고 법통을 받아 중국 화엄종의 제3 세조가 되었다.

또한, 한국 화엄종의 시조이며, 속성은 김(金: 혹은 박(朴)씨라고 함)이다 시호는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이다.

20세에 출가하여 650년(진덕여왕 4년)에 사형인 원효와 함께 당나라에 가던 도중에 난을 당해 이루지 못하고, 당항성의 어느 동굴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이때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도의 길이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그와 헤어진다.

그 후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의 혼란을 피하여 661년(문무왕 1년)에 당나라 사신의 배편을 빌려 타고 건너가 종남 산 지상사에서 지엄(중국 화엄종의 시조)의 문하에 현수(법장)와 같이 화엄의 깊은이치를 깨달았다. 현수는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고, 의상은 귀국 후 한국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의상은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하여 관음굴(낙산사)에서 백일을 기도하고 676년에 왕의 뜻을 받아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교학을 강술하여 화엄종(해동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692년(효소왕 1)에 현수는 승전이 귀국할 때 그의 저술 《화엄경탐현기》와 그 비판을 구하는 서신을 의상에게 보냈는데, 그 친필 서신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의상은 문하에게 이것을 나누어강술하면서 전교에 전심하다 죽었다. 사망 당시 향년 78세였다.

지눌(知訥: 1158~1210)

고려의 승려이다. 속성이 정이고, 자호가 목우자이며, 시호는 불일보조국사이며, 동주(서흥) 출생이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도의(821)국사를 조계종의 종조로 여기며, 보조국사 지눌을 조계종의중천조(분명하게 밝힌 조사)로 여기며, 태고국사 보우(1301~1382)를 중흥조(중흥시킨 조사)로 여긴다.

1158년 정광우와 부인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8세에 종휘에게서 승려가 되어 구계를 받고 일정한스승 없이 도를 구하였다. 1182년(명종 12년)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승려로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많은 선배를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창평의 청원사에서 《육조단경》을 읽다가 스스로 깨달은바가 있어서 속세를 피하고 도를 구하기 위하여, 1185년 하가산의 보문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대장경》을 열독하는 등 불도에 전력하며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득재의 청으로 팔공산 거조사에서 여러 고승을 맞아 몇 해 동안 정혜를 익히다가 신종 때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하며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참선하여 선의 참뜻을 깨달았다. 1200년 송광산 길상사에서 11년 동안 제자들에게 설법을 전하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금강경》, 《육조단경》, 《화엄론》, 《대혜록》 등으로 가르치고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경절문의 3종으로 수행을 이끌었는데, 믿음에 들어가는 자가 많았다.

저서로 《진심직설》《수심결》《정혜결사문》《상당록》《염불요문》《원돈성불론》 등이 있다. 지눌은182년 선과에 합격하고 청원사에 이르러 혜능의 《6조단경》에서 홀연히 깨치고, 이통현 거사의 《화엄론》에서 선·교가 다르지 않음을 알았고, 대혜 선사의 《대혜어록》에서 최후의 의혹을 씻었다 한다. 이러한 깨침의 과정은 그의 독창적인 선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지눌은 사람을 대할 때 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 경절문의 3문으로 하였는데, 이 3문은 각각 자신의 깨침의 계기가 된 《6조단경》《화엄론》《대혜어록》에서 나온 것이다. 지눌은 선·교의 배타성이 교리적으로 있을 수 없음을 논하여 돈오점수를 강조하였는데, 돈오는 중생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여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문득 깨치는 것이고, 점수는 그렇게 깨쳤다 하더라도 번뇌는쉽게 없어지지 않으므로 "정"과 "혜"를 꾸준히 닦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다.

지눌이 주장한 성적등지문 · 원돈신해문 · 경절문의 3문 중에서 원돈신해문은 돈오점수의 돈오와그 내용이 같고, 성적등지문은 점수와 그 내용이 같다. 그러나 이러한 돈오점수는 학문적인 해석의자취를 아직 가시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선의 화두를 공부하라는 것이 경절문이다.

지눌의 이러한 선사상의 체계는 조계 혜능의 선 속에 화엄을 흡수한 것이었다. 지눌의 조계선이이와 같이 독창적이었던 반면, 지눌 이전의 한국 선은 단지 중국 선의 연장에 불과하였다고 평가 받고 있다.

의천(1055~1101)의 천태 사상이 교로써 선을 융합하려는 것이었다면, 지눌의 조계종지는 선으로써교를 융합하려는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철(性徹, 1912년 ~1993년 11월 4일)

대한민국의 승려이다. 속명은 이영주이고 아호는 퇴옹이다. 대한민국의 선종을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승려이다.

1912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났다. 1936년 해인사에서 동산 대종사에게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38년 운봉을 계사로 보살계 비구계를 받았고 봉암사에서 청담과 함께 수행하면서 불타답게 살자고 결사하는 등 새로운 선풍을 고양시켰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이 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에 취임하였다.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1993년 11월 4일 세수 82세에 열반에 들었다.

교리를 대상으로 한 성철의 견해는 저서인 《선문정로》(1981)에 잘 노정되어 있다. 대한민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의 돈오점수에 반대하여 돈오돈수를 주창했다. 그 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불교 철학계의 돈·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성철은 지행합일 단계의 지만이 진정한 지이고 지눌의 돈오점수는 실제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현실을 좇지 않는 직접 지각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관념과 표상에 경도되어 실증성이 희박하게 조직된이론에 근거한 지(知)일 뿐 참 지(知)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으므로 시비를 가리기가 어렵다. 지눌은 일반인에게불교 교의를 풀어서 밝혔고 성철은 수행하는 승려에게 설법하였다.

중국 대륙에서 임제종을 개종한 임제의 후예인 선사 유신이 선종의 내밀한 특징인 소위 도교에서영향받은 화광동진을 교시하려는 취지로 한 설법인,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인정하겠노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을 성철이 원용하여 인상을 남기면서 일반인에게도 유명해졌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는 최초에 미망하는 단계는 수도하기 이전 평범한 일상계이나 수도를 이용해 득도하면 체험하는 평범한 일상을 완벽히 초월한 세계는 일상에서 하는 착각이 적멸한 상태이나 진정하게 득도하려면 거기서 진일보해 평범한 세계로 회귀하여야 한다.

화광동진을 이용해 다시 돌아온 그 세계는 외양상으로는 최초처럼 속되고 평범한 단계와 같으나 내면상으로는 처음과는 차원이 판이하다. 이는 나선형 성격을 띤 회귀를 뜻한다. 이로 보아 임제의 후예인 선사 유신이 설법한 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공안은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 사상을 그대로 해설한 교시이다. 재언하면, 수도자가 작고 대수롭지 않게 득도했을 때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인 듯 혼란스럽지만, 득도하는 규모가 확대되면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 외부 세계나 자연을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관망하는 태도를 획득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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