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역사: 노벨상을 거부한 니콜라 테슬라
현대 역사: 노벨상을 거부한 니콜라 테슬라
내가 사는 토론토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려면 해밀톤이라는 도시를 지나가야 합니다. 해밀톤은 내가 어릴때에는 교과서에서 읽은 도시입니다. 철강도시. 아직도 철강회사가 있지만 포항제철이 강해진 다음 구조조정을 통해서 아주 사세가 작어졌다고 합니다.
해밀톤을 들어가려면 해밀톤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건너다보면 철강 회사에서 하연 연기가 나오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옛날의 영광의 기억해 달라는 애걸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여간 다리를 지나 조금 지나면 니콜라 테슬라 길을 등장합니다. 한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해밀톤은 니콜라 테슬라를 축복했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니콜라 테슬러는 라디오, 리모컨, 형광등, 발전기, 전자레인지(왼쪽부터)등 800여개의 발명특허권을 보유했다.
"에디슨과 함께라는 노벨상 싫어"
니콜라 테슬러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 노벨상을 받기위해 로비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웃기는 사람이다. 노벨상의 수상 거부의 의견도 웃긴다. "단지 에디슨과 나란히 수상할 수 없기 때문이오" 라고 말했다.
에디슨은 당대나 지금이나 발명의 왕으로 추앙 받고 있는 사람인데 그와 같이 받는 것이 싫어서 노벨상을 거부한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는 많은 의문이 있다. 우리는 에디슨을 발명의 큰 인물로 알고 있고 테슬라는 거의 잘 모르기에 에디슨과 같이 받는다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지 않은가? 하는 그런 의문이다.
이후 이야기 전개에서 알려지겠지만 테슬라는 에디슨과 비교해도 결코 비중이 딸리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에디슨보다 우리의 생활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혹자는 그를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후 최고의 지성이라고까지 격찬한다.
테슬라의 업적은 미국 국방의 이유로 감추어지고, 적대적인 동구의 이민자란 이유로 무시되어져 왔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발명과 결혼한 사람, 무한에너지를 꿈꾸는 황당한 몽상가로, 자신의 발명이 세계대전에 쓰이는 것이 마음 아파 괴로워하는 휴머니스트로, 발명의 대중화를 위해 특허를 포기하는 멋진 사람으로, 그러나 말년은 돈에 의해 찌들린 삶으로 살아간 사람.
전류싸움서 테슬라의 '교류'가 승리
리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 )는 세르비아의 크로아티아구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통치아래 있었으므로 미국인들은 그를 러시아 출신으로 말하곤 한다. 세르비아는 얼마 전 크로아티아와의 내전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그전에는 유고 연방으로 우리에게 알려 졌다. 테슬라는 러시아인도 세르비아인도 크로아티아인도 미국인도 되는 셈이다.
테슬라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구 리카시 스밀리얀이란 작은 마을 목사의 다섯째 막내로 태어났다. 그라츠공과대학과 프라하대학에서 수학·물리학·기계학 등을 공부하였다. 비상한 암기력과 6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다.
테슬라가 에디슨의 논문을 읽기위해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부다페스트와 파리에서 전기기사로 일하였으며 1884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에디슨과 함께 일하기도 하였으나 연구방법이 서로 달라 헤어졌다. 연구방법의 차이는 자명했다.
에디슨은 반복된 실험을 하면서 발명을 했고 테슬라는 발명하기 전에 발명의 기반기술과 관계성을 판단한 후에 발명을 했다. 에디슨은 직류를 고집했고 테슬라는 직류의 한계를 알고 교류를 주장했다. 그래서 둘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교류시스템의 특허를 웨스팅 하우스라는 회사에 팔아버린다. 어느 누구의 발명 방법이 옳았다는 것은 없다. 에디슨은 발명의 왕이란 칭송을 듣지만 테슬라는 자장밀도의 단위로 그것도 전문가들이나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에디슨과 테슬라는 한쪽은 직류로 다른 안쪽은 교류의 발명가라는 대립된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테슬라는 에디슨을 바보로 만들었다. 교류와 직류의 전쟁에서의 최후의 승자는 테슬라의 교류가 된다. 이미 에디슨은 직류에 수많은 자금을 쏟아 부었고, 교류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한 수많은 시도 역시 실패하였다.
심지어 에디슨은 사형수를 교류 전류로 죽이고자 몇 번을 시도하지만 그것 마저도 실패한다. 에디슨의 직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전선의 두께가 매우 두꺼워야하고 거리에 따라 손실이 커져 수km를 가면 전기 공급소를 두어야 했다. 여기서 테슬라는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서 교류를 자신의 몸에 통과 시켜 전구를 켜게하여 위험성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교류방식이 전기 시스템의 표준으로 채택됐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시스템은 테슬라의 것이다. 현재 우린 전기 없이 살수 없다.
형광등·전자레인지 등 발명
테슬라는 110V 또는 220V로 각 가정에 전송되는 전기공급방식인 교류전류 시스템과, 다양한 색을 자랑하는 네온등, 형광등, 자동점화장치, 전자레인지, 자동차의 속도계, 리모트 컨트롤, 유도전동기발명, 교류발전기, 변압기, 전동기 등의 특허를 가지고 있고, 테슬라코일 발명했다. 무선에너지전송기술 연구했고, 세계 최초로 나이아가라폭포에 교류발전소를 책임지고 설치했다.
이런 테슬라가 왜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미국인들의 오만이 있었다. 러시아에서 이민 온 발명가 보다는 미국인인 에디슨이 더 그들에게 호감을 갖고 애정을 갖는 것이었다.
전세계에 전력 무상 공급 꿈꿔
공간에너지와 무한동력장치를 생각해낸 테스라는 무선으로 전 세계에 전력을 공짜로 송신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00년에 금융가인 모건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롱아일랜드에 무선 방송탑을 착공하였는데, 이 방송탑은 전 세계를 상대로 전화와 전신서비스, 사진, 증권정보, 기상정보 등을 보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원자 모건은 공간에너지를 전 세계에 무상으로 공급하려는 테슬라의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고 재정지원을 중단하였다. 태초 이래 이렇게 원대한 구상을 한 발명가는 없었다. 그리고, 에디슨을 가볍게 비웃을 발명가는 테슬라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대중화를 위해 특허를 포기한 테슬라에게, 전 세계에 무상으로 전기를 보내겠다는 테슬라에게, 전 세계에 무상 인터넷을 구상한 테슬라가 보기에, 에디슨은 탐욕적인 발명가, 전기의자나 만드는 비인간적인 발명가에 불과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이미 산업계에서 형광등이 발명되기 40여 년 전에 그의 실험실에서 형광등을 사용했다. 테슬라는 세계최초의 나이아가라 폭포에 위치한 수력발전소를 설계했고 그는 또한 자동차의 스피드메터에 관한 특허를 최초로 얻었다.
AC시스템이라는 단어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죠지 웨스팅하우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와 AC 1킬로와트당 2.5달러를 받는 조건의 계약서에 서명하였다. 이로인해 테슬라는 그가 꿈꾸어왔던 모든 실험들을 시작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에디슨은 이미 자신의 DC시스템에 많은 돈을 투자했기 때문에 테슬라의 평판을 나쁘게 만들기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바쳤다. 에디슨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DC전력보다 AC전기가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의도적으로 사형집행에 사용하는 전기의자를 AC로 작동시키게 만들기도 하였다.
테슬라는 그러한 계획을 스스로의 마켓팅 홍보 무대에서 무력화 시켰다.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참가인원이 2천 1백만명에 이르렀던 세계전시회에서 그는 고주파 AC전력이 그의 몸을 통과하여 전구가 켜지는 것을 보임으로서 AC전기가 얼마나 안전한가를 시연했다. 그 다음에 그는 그의 테슬라코일에서 관중들에게 아무런 해가 없이 커다란 방전번개를 발사했다. 멋진 트릭이었다.
테슬라에게 지불해야할 로열티가 백만불에 다다르기 시작했을 때 웨스팅하우스는 자금적인 문제에 빠져들게 되었다. 테슬라는 만일 그의 계약서가 계속 유효한 상태로 있게 된다면 웨스팅하우스는 도산하게 되고 그가 채권자들을 다루는데 아무런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꿈은 모든 사람들이 값싸게 AC전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테슬라는 계약서를 찢어버렸다. 그는 세계최초의 백만장자가 되는 대신에 자신의 특허권들을 216,600달러에 웨스팅하우스에게 양도하게 된다.
1898년에 그는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세계최초의 무선조종 모형보트를 시연했다. 테슬라는 전세계에 프리에너지를 제공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1900년에 자본가 J. P. Morgan으로부터 15만불의 후원을 받았던 테슬라는 뉴욕의 롱아일랜드에 그가 "Wireless Broadcasting System"라고 부르는 타워를 짓기 시작했다.
이 방송타워는 전화, 전신 서비스 및 화상전송, 주식정보, 날씨정보등을 전세계적으로 연결시킬 계획이었다. 불행하게도 모건은 그것이 전세계에 대한 프리에너지를 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금을 끊어버리게 된다.
많은 이야기들은 그 타워가 독일의 유보트의 항로를 잡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미국정부가 세계 1차대전당시 그 타워를 파괴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테슬라는 그 프로젝트에 대한 모건의 자금이 끊긴 후로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그 타워는 채권자들에게 고철로 팔리게 되었다. 세상은 그를 바보로 여겼다. 아무튼 이 당시에는 목소리, 화상, 전기의 전송에 대해서 귀담아 들어주질 않았다.
그들이 몰랐던 것은 마르코니의 발명이 알려지기 거의 십 년 전에 라디오의 원리를 이미 시연했었다는 것이다. 사실 테슬라가 사망한 1943년에 대법원은 마르코니의 특허가 테슬라의 이전의 기술 때문에 무효라는 판정을 내렸다. 아직까지도 거의 모든 문헌들은 테슬라가 라디오를 발명한 것에 대해 인정하질 않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언론계는 테슬라의 주장들을 과장하기 시작했다.
테슬라는 화성과 금성으로부터 라디오 신호를 수신했었다고 기록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가 실제로 머나먼 별들로부터 신호를 받았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당시에는 우주에 대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었다.
그 대신에 언론계는 그의 엉뚱한 주장들이라고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그의 맨하턴 실험실에서 테슬라는 지구를 전기튜닝포크로 만들었다. 그는 그가 위치한 바로 아래의 땅과 같은 주파수로 진동시기키 위해 증기로 작동되는 진동장치를 작동시켰다. 결과는 도시의 모든 주변에 지진이 발생했다. 빌딩들은 흔들렸고 창문이 부서지고 벽에서 회반죽들이 떨어졌다.
테슬라는 이론에 따르면 같은 원리로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을 파괴하거나 지구를 둘로 나누는데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테슬라는 과학적으로 그의 결과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되기 60여 년 전에 지구의 공진주파수를 정확하게 알아냈었던 것이다. 그가 공개적으로 지구를 둘로 나누는 것과 같은 종류의 실험들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1899년 그의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연구실에서 그는 에너지 파동을 지구의 모든 방향으로 보냈고 그 파동들은 원점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지진의 진원지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에 관한 이론을 제공하였다. 파동들이 되돌아올 때 그는 거기에 전기를 추가했다. 결과는 인간이 만든 인공번개 중에 기록된 적이 없는 130 피트(약 40 미터)의 인공번개를 만들어내었으며 아직까지 그 기록은 깨어지지 않고 있다.
그와 동반된 천둥소리는 22 마일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으며 그의 연구실 주위의 모든 초원은 이상한 푸른 발광현상을 나타내었고 그것은 St. Elmo's Fire와 유사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의 실제 실험에 대한 워밍업에 지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그는 지역 발전소의 장비를 파괴시켰고 그는 그 실험을 다시는 행할 수 없게 되었다.
세계 1차 대전 초기에 미국정부는 필사적으로 독일잠수함의 항로를 찾아내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정부는 적당한 방법을 찾는 일에 토마스에디슨이 일하도록 하였다. 테슬라는 이 배들을 찾기 위해 에너지 파동을 사용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레이다에 해당된다.
에디슨은 테슬라의 아이디어를 웃기는 일이라 치부하고 거절하였으며 인류는 그것이 발명되기 까지 25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그의 독창성을 가진 창조적인 일생에 대한 보답은 테슬라만 빼고 모두에게 주어진 에디슨 메달이다. 테슬라가 에디슨으로부터 받았던 모든 언어적 모욕 후에 우리가 그를 공공연하게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들은 계속된다. 과학문헌들로부터 그를 지워내기 위한 산업계의 노력이 거의 20년 동안에 걸쳐 추진되었었다. 자본이 부족하게 되면서 그는 실험이 행해지지 못한 이론들을 셀 수도 없이 많은 노트에 단지 기록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세상을 만든 그는 1943년 1월 7일 무일푼으로 8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장에는 2천 여 명 이상의 조문객들이 참석하였다. 테슬라는 그의 일생동안 800개 이상의 여러 특허권을 받았다. 그가 파산하지 않았다면 에디슨의 기록을 능가했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30년 동안 매우 적은 특허출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에디슨과는 달리 테슬라는 대체로 과학에서 선례가 없는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있었던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불행하게도 세상은 테슬라의 독창성에 금전적인 보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테슬라가 알려준 개념들을 정제하여 유용한 생산품들을 만든다는 것을 인정할 뿐이다.
저도 테슬라는 처음들어보네요
에디슨보다 위대한 사람이였군요.
형광등 , 라디오 , 시대를 잘못탄거였을까요 아님 사회성이 약했던거일까요...
이민자의 한계라고 추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