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와 나의 역마살

in #kr3 years ago (edited)



누나는 히피다.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한다. 누나에게 여행은 도피나 이벤트가 아니라 그냥 삶 자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20대가 훌쩍 넘어 어느날 가출해서 홍대 근처에 살다가, 또 제주도로 한달간 무전여행을 하더니, 이윽고 어학연수를 핑계로 호주로 갔던게 시작이었다. 남미, 아프리카, 인도, 미국, 유럽 등.. 나무 위에 집을 짓고, 텐트를 치고, 지역의 히피 공동체를 찾아 생활한지 10년이 넘었다. 너무 돌아다녀서 지금 누나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 지경까지 왔다.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고. 가끔 집에 올때마다 물어보지도 않은 자신의 보이프렌드 사진(보통 20대 중반의 젊은 서양 남자가 웃통을 벗고 있는)을 보여주며, 전세계에 남친을 한명씩 두고 있노라 자랑하면 나는 방구 뀌고 내 방으로 간다.

누나를 보면 같은 배에서 나온게 맞나?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누나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는 삶을 사는 반면에, 나는 친구 집에서 새벽까지 술마시다가도 이윽고 내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해야하는 성격이다. 나는 여행을 즐겨하지 않을 뿐더러, 가끔 여행을 가면 그 도시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은 하지만 한번도 진지하게 타국에서 살고 싶다고 고려한 적은 없다. 나는 그냥 내 집에서 사는 것이 좋다. 누나가 말을 탄 유목민이라면 나는 밭을 일구는 정착민이다.

작업실에서만 사는 나를 보며 가끔 누나는 답답하다는 듯 말한다. 야, 아티스트라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지 않겠니? 누나와 다른 세계관에 거주하는 나는 그 질문을 믿지 않는다. 누나, 다양한 경험이란 단순히 신체를 다른 장소로 옮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충족될 수 없어. 그보다 더 충만한 경험이란 오늘은 내 방의 왼쪽 벽을 응시했다면, 내일은 오른쪽 벽이나 천장을 바라보며 살아보는 것이야. 알간? 그러나 생각해볼수록 누나와 나는 한 배에서 태어난 게 맞다. 우리는 둘 다 지독한 역마살을 가지고 있다. 별과 별 사이를 떠도느냐, 아니면 세포와 세포 사이를 탐험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누나가 인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로 유랑하는 동안, 나는 내 작업실 안에서 다이나믹한 여행을 한다. 몇 년간 그림만 그렸다가, 또 한동안 영상을 편집했다가, 지금은 오로지 피아노 앞에서만 살고 있다. 이 좁은 공간 안에서 내면의 정체성만 달리했을 뿐인데도 너무나도 다른 삶이다. 이보다 더 여행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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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여행으로도 삶이 풍요로울수 있는거 같아요

사람마다 성향 차이가 있는거 같고 그건 잘 안 변하는것 같습니다.

그 영화에 나오셨던분 맞지요? 누나분 책을 쓰셔야 할 것 같은데요ㅎㅎ

책을 쓰려면 의자에 오래 앉아있어야 하는데 누나는 그걸 못 해요 ㅋㅋㅋ

앗..그건 생각지도 못했네요ㅋㅋㅋ

예술적 기질이 충만한 남매이신가 봅니다. 멋집니다. ㅎㅎ

누나의 예술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둘이 밖에 나가면 차림새로 볼때는 누나가 100퍼 저보다 아티스트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