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별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지났다

in #kr6 years ago (edited)





언젠가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친구가 술자리에서 자신은 10년동안 플래너를 쓰고 있다고 했다. 우와..10년? 뭐든 10년 지속한 사람은 인정하지. 그게 자기 삶을, 하루를 조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매번 하루를 훌러덩 분실하고 있는 나는 귀가 솔깃했다. 그 자리에서 택시를 타고 우리는 서점으로 갔다. 그 친구가 쓰는 비싼 플래너를 나도 구입했다. 가죽으로 된 고급진 커버가 내 부실한 하루를 대신 책임져 줄 것만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 계획을 리스트업 하고, 잠들기 전에는 아침의 목록을 빨간 줄로 그었다. 나는 좀 더 계획적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한 달이 지났을까. 직장인이 아닌 나에게 하루 일과라는 것은 굳이 적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다른 용도를 생각해야 했다. 나는 군인시절 이후에 처음으로 일기를 써보기 시작했다. 처음 일주일은 별 말을 다 썼다. 하지만 쓸 말이 다 떨어지고 난 후에, 난 플래너에 단 하나의 문장만 반복하고 있었다. "오늘도 별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지났다." 이 문장만 보름 연속으로 쓰고 있자니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나 싶었다. 중단했다. 내 일상은 매일매일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관점 없이 쌓여가는 기록은 의미 없는 쓰레기일 뿐. 오늘은 유튜브에서 우주의 종말에 대해 검색했다. 별과 은하도 서로서로 모두 멀어져서, 결국에는 모든 에너지가, 블랙홀마저 모두 증발하고 만다고 한다. 해묵을대로 해묵은, 촌스럽고 뻔한 비유들이 떠올랐다. 이를테면 인간의 삶..이라던지. 어서 잠을 자야겠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나는 얼마간 다른 존재가 된다. 인간의 망각은 진화의 결과라고 했던가.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오늘도 별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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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a 캘린더 4년, 네이버 캘린더 7년, 구글 캘린더 5년입니다. 제 직장생활이 모조리 보관돼있죠. ㅎㅎㅎㅎㅎ 종이는 자꾸 분실해서 디지털에 의존하고 있어요. ^^ pda를 쓸 땐 일상도 기록했는데요, 네이버 캘린더로 넘어가며 거의 업무일지화 돼버린 게 좀 아쉬워요.

저도 결국에는 스마트폰 캘린더로 돌아갔습니다 ㅎㅎ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편리함을 결국 이기지 못했던 것 같아요. 뭔가 내 일상이 매일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간단한 업무일지라도 데이터가 엄청 쌓이면 나중에 돌아보는 재미도 있겠어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나는 얼마간 다른 존재가 된다.

특별할 것 없다는 thelump 님의 하루에도 이런 순간들은 많을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D

야심한 밤의 쓸데없는 잡생각들을 아침에는 잊어버린다는 뜻이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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