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홈커밍보이 1화_ 지우는 화가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는데 되돌아오지 않는 순간이 있다. 노래는 멈추었고 김빠진 맥주 앞에서 긴 밤을 맞는다. 컴퓨터에 저장된 오래전 목탄 드로잉들을 하나씩 들춰본다. 나도 진짜 ‘그렸’던 때가 있었구나. 마치 전성기를 회상하는 노인네마냥 옛 작업을 보고 아련한 감정을 품는 내가 가소롭다. 하지만 이십 대 중반에 마치 웜홀처럼 내겐 어떤 세계가 갑작스럽게 열렸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그러나 미처 맛보기도 전에 무섭게 닫혀버렸다.
화가로서 내가 재능이 있는지는 늘 의심하지만 적어도 안목을 지닌 괜찮은 관객이라고는 믿는 편이다. 굉장히 드문 일이지만 간혹 갤러리나 인터넷에서 ‘그리는’ 그림을 발견한다. 눈이 호강한다. 좋은 그림과 마주한다는 것은 행운이다. 올해 초에 인스타그램에 가입하여 세계 곳곳의 화가들이 그린 다양한 그림을 감상했다. 스크롤을 주욱 내리다가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으면 팔로우를 눌렀다. 홈커밍보이는 그 중 하나였다. 간간이 올라오는 그의 그림을 몇 개월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뭘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채색의 공간이 이리저리 분할된 그림이었다. 공간마다 묵직한 중력이 있었고, 그 중력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그의 계정에 모델을 구한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한국인임을 알고 있었지만 같은 도시에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폴 오스터에 따르면 이런 사소한 제안과 우연이 삶의 중요한 연대기를 구성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의 모델을 하면 나도 그림에 대한 새로운 영감과 열정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좋은 화가 한 명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당장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홈커밍보이를 만났다.
8월의 뙤약볕이었다. 홈커밍보이는 예상보다 훨씬 진지한 사람이었다. 중국집에 마주 앉아 음식을 주문하자마자 그는 자신의 예술론을 늘어놓았다. 보통 초면에 사람을 만나면 먼저 본론과는 상관없는 형식적인 대화를 에피타이저로 하기 마련인데, 홈커밍보이는 내게 시구 없이 곧바로 돌직구를 날린 셈이었다. 당황하면서도 반가웠다. 그림에 대해 이렇게 심각하게 말하는 사람의 표정을 봤던 때가 언제였던가. 그의 목소리는 짜장처럼 거침없었고 눈빛은 고량주보다 뜨거웠다. 그러나 어림잡아 그의 말을 추측할 뿐 정확히 무엇을 내게 이야기하려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많은 작가가 그렇듯 그는 전혀 청자를 고려하지 않는 말하기 방식을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이었다. 나는 무대 위 배우의 독백 앞에서 짬뽕을 먹고 있는 관객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사람은 언제나 불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프렌츠 파펜하임의 책에 의하면 불안은 근대로부터 시작된 개념이죠. 그래서 이게 어떻게 있을까.. 라고 생각해봤을 때 저는 자연이나 풍경은 도저히 그릴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모델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있는가, 아니 진짜로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요.
크라운 초코하임은 숱하게 먹어봤어도 프렌츠 파펜하임은 금시초문이었다. 아, 그렇군요. 라는 말 외에는 별다른 대꾸를 할 게 없을 때마다 앞에 놓인 짬뽕을 후루룩 집어삼켰다. 그의 마지막 문장만이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았고, 유일한 단서였다. 모델이 ‘진짜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린다니. 그렇다면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는 눈앞의 모든 존재를 의심한다는 말일까? 몇 차례의 선문답 같은 대화가 오간 후 어떤 짐작이 생겼다. 아니 짐작이라기보다는 확신을 했다. 사실 나는 그가 뭘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도 회상하는 단계인, 힙하고 힙한 컨템포러리한 아트가 판치는 이 21세기에, 젊은 20대의 아티스트가 캔버스 앞에 모델을 앞에 앉혀놓길 원할 때부터 감을 잡았다고나 할까. 그에게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정확히 레퍼런스에 대한 질문이었다.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자코메티.
그때부터는 대화가 조금 수월해졌다. 내가 아, 하면 아, 했고 그가 어, 하면 어, 할 수 있었다. 조각으로 유명한 자코메티이지만 대학 시절 나는 그의 그림에 매료되었다. 자코메티의 모델이었던 제임스 로드가 쓴 책 <작업실의 자코메티>를 읽으며 얼마나 폭풍 공감을 했던가. 자코메티는 갓 태어난 신생아처럼 보길 원했다. 본다는 행위는 느긋느긋한 관조가 아니라 매번 폭력적인 사건이었다. 그에게 모델은 볼 때마다 처음 보듯이 새로워야 했다.
그의 예민한 눈빛은 모델의 표면에 안착하기도 전에 매번 좌절되었고, 때문에 그림은 그려지기가 무섭게 지워졌다. 보는 행위에 집중할수록 그림은 완성될 수 없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을 향해 붓으로 겨우 흔적을 남기는 행위는 거슬러 올라가면 세잔의 과업이기도 했다. 흰 여백에 뭔가를 채워놓는 화가는 수두룩하게 많아도, 이처럼 ‘지움으로써 그리는’ 화가는 굉장히 드물다. 그를 알아채기까지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홈커밍보이가 내게 건넨 첫마디로 충분했다. 제가 하는 일은요, 지우는 일이에요.
초코하임 ㅋㅋㅋ 알베르토 자코메티라고 하시니 어떤 모습일 지 조금은 이해가 가면서도, 무엇을 그려 어떻게 지울건지 또 궁금해집니다.
초코하임에 웃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장 신경쓴 부분이었습니다..ㅎㅎ
크라운 초코하임 ㅋㅋㅋㅋ
결국 자코메티를 좋아해서 자코메티를그리는 사람이군요 ㅋㅋ
네 그렇게 설정했습니다. 사실 저도 자코메티 빠돌이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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