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로이, 취향의 간격

in #kr2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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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번에 살면서 시간이 나면 안가본 동네로 트램 나들이를 가거나, 발길 닫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덕분에 숨어있는 보석같은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별이 여러 개 붙은 유명한 장소에 가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처럼 똑같이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고 찾아온 사람들만 바글바글했고, 사진에서 본 똑같은 장소에서 받는 감동은 기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무난함이 싫어서 우린 카페든, 펍이든, 지나가다 느낌이 좋으면 무작정 들어갔다. 남자친구는 그런 면에서 촉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우린 '우연히' 찾아들어간 장소에서 기대 이상의 감동을 받곤 했다. '블랙캣 피츠로이(Blackcat Fitzroy)'가 그랬다.

멜번에 사는 동안 참 좋아했던 동네, 피츠로이(Fitzroy).
피츠로이는 예술가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예술가들이 어디 있다는 거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동네에 들어서면 알 수 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히피스러움, 보헤미안의 자유로움이 거리의 벽화와 빈티지한 벽돌 건물, 아담한 상점, 간판 없는 펍과 카페에서 충분히 느껴진다. 집에서 트램을 타도 갈 수 있지만 그곳까지 걸어가는 거리 자체가 지루할 틈이 없어서 시간이 나면 습관처럼 피츠로이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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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캣(Blackcat)’은 거리를 걷다가 가게 앞에 무심하게 놓인 벤치와 윈도우 안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끌려서 정말 ‘우연히’ 들어간 곳이다. 규모는 작지만 특유의 높은 천장과 빈티지한 외관에, 나무며 꽃들이며 푸른 식물이 곳곳에 매달려있어 한눈에도 자유롭고 한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커다란 통 유리창 앞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좌석 배치가 특이하다. 멜번 카페를 가면 유심히 보게 되는 게 자리 구성인데 결코 형식에 얽매이는 법이 없다. 자로 잰 듯 일렬로 쭉 늘어서지 않고, 어떤 좌석은 창 밖의 풍경을 향해, 또 어떤 좌석은 벽을 향해 놓여있다.

의자도 제각각이다. 푹신한 소파부터 엉덩이 하나만 겨우 걸칠 수 있는 딱딱한 나무 의자까지 언뜻 보면 집 앞에 버려둔 걸 하나씩 주워온 것처럼 보였다. 동네 벼룩시장에서 아주 오래된 가구를 얻어 온 것처럼 촌스럽지만 그럼에도 자꾸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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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작은 바(Bar). 한눈에도 독특한 개성이 느껴지는 인상의 남자가 빨간 두건을 쓰고, 무지개색 옷을 입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빨간색 앞치마를 한 채 온화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시도해보지 않았던 이름의 맥주 두 잔을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짙은 나무 프레임에 옅은 갈색을 띤 가죽 소파다. 7,80년대로 회귀한 것처럼 빈티지하다. 뒷쪽에 소박하게 꾸며진 디제잉 공간도 보인다. 분명 상업적인 공간인데 누군가의 아지트에 놀러 온 기분이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한 여자가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있다. 테이블 하나를 두고 소파 세 개가 테이블을 감싸듯 놓여있다.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워간다. 여자가 앉아 있던 바로 옆 소파에 한 남자가 앉았다. 습관인 것처럼 맥주를 시키고 책을 꺼낸다.

이런 대낮에 술집에서 책을 보는 장면도 신기했지만, 공교롭게도 두 남녀가 각각 다른 소파에 앉아 테이블 하나를 두고 똑같이 책을 읽는 게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이런 흥겨운 펍에서도 책을 읽을 정도라면 둘의 취미는 분명 독서일 것이다.

둘은 알고 있을까.
나와 똑같은 취미를 가진 이성이
바로 곁에 앉아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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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자연을 좋아하고, 음악을 즐겨 듣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 우리가 '우연히' 끌려 들어온 이곳에서 우리와 비슷한 취향의 사람을 만났다. 우리 손엔 책이 없지만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들어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두 남녀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문득 연인이 되기 전, 처음 대화를 나누던 때가 떠올랐다. 어쩐지 공통점이 많아 잘 맞았던 사람이었다. 그가 듣던 음악과 자주 보던 영화는 내 취향이었다. 내가 하려던 말을 그가 했고, 그가 느꼈던 감정을 나도 똑같이 느끼곤 했다. 연인이 되고 우린 자주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린 같은 별에서 왔을 거야.'

가게 밖 야외 테이블은 나무와 푸릇푸릇한 잎들로 둘러 쌓였다. 시원한 바람, 푸른 잎들이 가져다주는 풀 향기, 그 안에서 한 잔씩 잔을 들고 마주보며 웃는 사람들. 이곳에선 모르던 사람들도 눈을 맞추면 대화를 시작한다. 처음 호주에 왔을 때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게 모르는 사람과 인사하는 것이였다. 서울에선 낯선 사람이랑 눈이 마주치면 멋쩍어 눈을 피하던 내가, 이젠 태연하게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고 인사를 한다.

차갑고 삭막한 콘크리트에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서 있던 서울의 빌딩이 떠올랐다. 남산타워가 보이던 명동 한복판에서 일했던 그때는 늘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빌딩 건물처럼 서늘하고 삭막했다. 그러고보면 장소는 사람을 닮고, 사람은 장소를 닮는다. 차갑고 삭막한 장소에는 늘 차가운 표정의 사람들이 있다. 초록 풀잎 사이로 햇빛이 비추는 이곳에선 낯선 사람과 눈을 맞추고 인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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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낮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바뀐다.
남자친구는 기분이 좋았는지 또 한잔을 시켰다. 겨우 한잔 마셨는데 알딸딸하다. 자리를 옮겨 아까 책 읽는 남녀가 앉았던 소파에 앉아 본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다시 피츠로이에 간다면,
그땐 좋아하는 소설도 한 권 끼고 가야지.
그리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물어봐야지.

어떤 책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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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cat Fitzroy

252 Brunswick St, Fitzroy VIC 3065
+61-3-9419-6230
www.blackcatfitzro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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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_^

감사합니다:)

사람들 관련내용 잘봤네요. 안녕하세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흥미로운 기술 관련 기사들 잘 보고있어요. 자주 소통해요 감사합니다:)

ㅎㅎㅎ감사합니다 사람들 만나는 재미는 정말 쏠쏠하죠

외국 외국 느낌이 착 나는 곳이군요

먹스팀 올려주신거 보니 입맛 다시게 되네요:)

짱짱맨 호출에 출동했습니다!!

매번출동!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뉴비지만 용기내보네요:)

<행복한 스팀잇 만들기 프로젝트> 이웃의 글을 추천하고 보팅도 받고에서 @sundaykim님이 추천 해주셔서 응원보팅 하고갑니다~ :D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D

와 기분좋네요:) 좋은 프로젝트 너무 감사합니다. 스티밋은 새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반겨주는 문화가있어 참 좋은거 같아요. 이벤트 참여 자주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