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야기] 1. 설겆이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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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요즘, 지난 날의 일들을 기록해 봅니다.


2002년!

월드컵 응원의 열기로 뜨거운 시절, 나는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English Conversation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됐던 낮은 수준의 언어 감각, 태어날 때부터 간직해 온 소중한 내성적인 성격, 그리고 학원에서 버스로 2시간 걸리는 원거리의 저렴한 자취집까지... 방과후 친구들과 어울려 유흥을 즐길 수 없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난 학원 수업을 마치면 항상 무엇에 쫒기는 것 마냥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놀다가 밤늦게 집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타는 날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발생되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의 생활비를 내 잠깐의 사치스러운 유흥을 위해 사용할 만큼 난 용감하지 않았다. 지금은 후회한다.

어쨌든 난 혼자 였다. (절대 사교성이 떨어졌다는 건 아니다. 상황이 그랬다.)
방과 후에는 시간의 대부분을 잘 들리지도 않는 그놈의 CNN이 나오는 텔레비젼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보내곤 했다. 가끔은 프렌즈도 봤다. 그나마 그게 좀 더 잘 들렸으니까... ㅋ

아, 내가 이러려고 여기에 왔나? 돌아갈까?
아니야, 부모님이 어렵게 지원을 해주셨는 데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소기의 목표를 달성해야 해.
버티자, 버텨야 해...
그런데, 이제 이 식빵에 잼은 지겨워... 계란 후라이도...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시간을 보내던 내게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교 절친의 캐나다 어학연수 결정!!!

그 녀석을 기다리면서 보낸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은 즐거웠다. 머난먼 이국땅에서 나를 잘아는 사람 하나쯤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기에.. 물론, 한편으로는 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 부분이 나의 흑역사가 공개되는 상황을 불러올까 하는 불안감도 존재했다.

어쨌든 그 녀석이 캐나다에 온 후 우린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 한 집에서 살면서 우린 캐나다에 있으니까, Western style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이런저런 규칙을 정하기 시작했다.

냉장고 칸은 나눠서 사용하고 다른 사람 칸은 침범하지 않기
상대방 음식이나 음료수가 먹고 싶을 땐 허락 구하기
자기가 먹은 그릇은 무조건 바로 설겆이 하기
일주일마다 당번 정해서 청소하기 등등등

우린 정해진 규칙을 지켜가면서 큰 문제없이 지내고 있었지만, 사소한 문제는 물론 많았다. 그런 사소한 문제들이 쌓이면 큰 문제가 된다라는 간단한 상식을 무시한 게 그날의 발단이었다.

그날은 같은 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일본인 친구와 한국인 친구를 집으로 초대한 날이었다. 간만에 한국 식료품점에서 재료들을 구입해 솜씨를 뽐냈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한국 가정식을 컨셉으로 밥, 잡채, 몇가지 반찬들을 했던 것 같다. 난 내가 만든 잡채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_^

가벼운 맥주와 함께 맛있게 음식들을 먹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깨진 영어, 일본어, 한국어가 난무했다.

이따다끼마쓰, 잘 먹습니다.
카오리, 아나따와 카와이 데스까? 맞아요, 노노 You are not 카와이.
와따시와 칸코쿠진 카라키마시다. 아나따와 니혼진 데스까?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자리를 정리할 무렵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그 녀석의 눈물!!! 그것도 서러워서 우는 눈물!!!

울면서 그 녀석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어로 했다.

야! 내가 이것까지 설겆이 하러 왔냐?
너도 설겆이를 좀 해야 할거 아냐.
너 이번주에 설겆이 몇 번 했어?
내가 설겆이 하러 여기 왔냐?
내가 주부 습진이 생겼어.

뜬금없었다. 누구도 그 녀석에게 설겆이를 하라고 하진 않은 상황에 일본인 친구들은 영문을 모른 채 당황했고, 한국인 친구들도 역시 당황했다. 나도 당황했다. 고작 설겆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니... 그리고 그 설겆이는 내가 할 참이었다... 진실이다.

어쨌든, 왠지 모를 설움이 폭발한 그 녀석은 결국 울면서 집을 뛰쳐 나갔다. 날씨가 좀 쌀쌀한 날이었는 데, 트레이닝복 하의에 반팔을 입고서 말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땐 참 성급한 녀석이었다. 모름지기 무언가를 추진할 때 성급하면 안된다. ㅋ

그 녀석이 그렇게 사라지고 남은 우리는 말없이 정리를 시작했다. 물론, 설겆이는 내 중심으로 한국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정리가 끝난 후 조용히 친구들을 배웅해 주었지만, 일본인 친구들에겐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없었다. 내가 부끄러워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물론 나중에 이야기 해주었는 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일본인 친구들은 너희가 부부라도 되냐고 라고 물어보았다. ㅋㅋ

배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주변을 살짝 살펴보았지만, 멀리까지 가서 살펴보진 않았다. 밤길은 언제나 무섭다. 하지만,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현관문은 잠그지 않았다. 울면서 서둘러 뛰쳐나가느라 열쇠를 갖고 가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조그만 배려심을 발휘해 보았다.

난 잠자리에 들었고 언제 들어왔는 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날 아침 거실 소파에서 자켓 하나 걸치고 자고 있는 녀석을 발견했다. 아마 민망해서 방에 들어와 이불을 가지고 가진 못했던 것 같았다. 난 말없이 이불을 덮어 주었고, 깨어 있는 것 같은 데 안 깨어 있는 척 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른 척 해주었다.

잠시 후 일어난 우리는 서로 민망해서 아무 말 않았지만, 눈빛 교환으로 수업을 가볍게 제끼기로 하고 우리의 친구인 CNN과 프렌즈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전날의 해프닝은 별다른 노력없이 그렇게 정리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녀석은 화가 풀려서 집에 돌아온 건 아니었다.
1년 넘게 끊었던 비싼 담배와 라이터를 편의점에서 산 후 집주변 놀이터에서 피고 있는 데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 후 경찰차 싸이렌 소리까지.. 쫄려서 집으로 돌아온거다.
ㅋㅋ 겁보! 그날 밤 그 주변에서는 아무런 사건사고가 없었다.

요즘도 가끔 그날이야기를 하면 그 녀석은 나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너 때문에 1년 넘게 끊었던 담배를 다시 필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고마웠다고.

여전히 그 녀석과는 절친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 안된다. 진정 설겆이 때문에 울었던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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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angjjangman 태그 사용시 댓글을 남깁니다.)
호출에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

재미있는 일화네요. 캐나다는 담배값이 엄청 비싼데 그 비싼걸 한국도 아니고 캐나다에서 다시 피우시다니, 어지간히 서러웠던 모양이네요^^

네, 많이 서러웠던 모양이에요. 그 후 담배는 말아서 피는 게 좀 더 저렴하다면서 집에서 열심히 말더라구요. ㅋㅋ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같이 사는 건 정말 사소한 부분부터 걸리는 게 많은게 같아요.ㅎ 뭔가 많이 쌓이셔서 터진거 같은데..왠지 사소한 거라는 걸 알고 민망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ㅎ
이런 걸 추억이라고 하겠죠? 아직도 절친으로 지내고 계시니..ㅎㅎ
아 언젠가 저 고맙다는 말이 욕으로 바뀌지 않길.ㅎㅎㅎ

ㅋㅋ 여행 깄다가 많이 싸우고 돌아오는 커플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잖아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어렵나봐요. 그래도 설겆이는 좀. ㅋㅋ

41_풀보팅받아랏!!!.gif

@strosalia님 스파업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D 아직 플랑크톤에 불과한 스팀파워지면 풀파워로 감사인사 남기고 갑니당!!

감사합니다. 고래가 되시는 그날이 오길 기원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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