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한국소설] 1. 최서해 <탈출기>
한국 근현대소설을 소개하는 포스팅을 연재하기 위해 문학전집을 구매했다. 새 책으로 사기에는 가격이 부담스러워 중고로 알아보았는데 문학전집들이 너무 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어서 놀랐다. 창비에서 발간한 [20세기한국소설] 1차분 22권을 택배비 포함 35,000원에 구입했다. 소설책이 참 시세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 시절 종로서적에서 잘 팔리지 않아 오래된 초판본이 남아있는 소설책을 싸게 사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소설책을 싸게 샀는데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창비의 [20세기한국소설] 전집은 전50권으로 2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 근현대소설 전체를 살펴볼 수 있고 단편 위주로 수록되어 있어서 읽기에도 부담이 덜하다. ‘참여문학’에 방점을 두었던 출판사의 전통이 작가 선정에 반영되어 쉽게 접하지 못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된 점도 마음에 든다. 그런데 며칠을 고민해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답은 나오지 않는다.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고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써보기로 한다. 작가에 대해서 소개할 수도 있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사회 현실을 짚어볼 수도 있고,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선정한 소설은 1925년에 발표된 최서해의 <탈출기>다.
최서해는 1920년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좌파 문학운동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카프)의 초기 대표작가로 꼽힌다. 사실 카프 작가들의 작품은 80년대만 해도 쉽게 접할 수가 없었다. 월북한 작가들의 경우는 논문에 이름도 언급할 수가 없어서 ‘이xx’처럼 요즘말로 블러 처리해야 했고, 작품도 읽을 수 없었다고 한다. 카프 작가들의 많은 작품이 80년대 후반에서야 일반에 공개되었고 문학적 가치를 평가받게 되었다.
카프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국문학사 파트에서 암기할 사항 몇 개로 언급되고 박영희의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말로 정리되었던 기억이 난다. ‘순수’한 문학을 무엇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국문학과 교수의 글을 텍스트로 배웠을 것이며,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 그저 시험에 출제될 만한 몇 가지 암기사항만을 전달했을 것이다. 물론 카프의 문학활동은 비평이 주도적이었고 조직운동에 큰 비중을 두어 실제 작품에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분명 카프의 지도부가 사회주의 사상을 책으로 습득한 지식인 계층이었다는 점에서 문학적 한계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최서해는 특히 주목할 만한 작가다. 최서해는 열일곱 살에 간도로 이주한 뒤 최하층 생활을 하며 이것저곳을 떠돌았다. <탈출기>의 화자 ‘박군’ 역시 희망을 품고 어머니, 아내와 함께 간도로 가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지만 세 식구 먹고 살기에도 힘든 현실에 부딪친다. 소설에 언급된 품팔이, 도벌꾼, 두부장사의 밑바닥 생활은 모두 그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만삭인 아내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버려진 귤껍질을 먹는 것을 가족들 몰래 무언가 먹는 것으로 오해했던 자신을 책망하는 장면이다.
‘오죽 먹고 싶었으면 오죽 배가 고팠으면 길바닥에 내던진 귤껍질을 주워 먹을까! 더욱 몸비잲은* 그가. 아아, 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한 아내를 나는 의심하였구나! 이놈이 어찌하여 그러한 아내에게 불평을 품었는가? 나 같은 간악한 놈이 어디 있으랴. 내가 양심이 부끄러워서 무슨 면목으로 아내를 볼까?’
*몸비잲다 - 아이를 배다
[20세기한국소설] 4권 19쪽
열심히 살아도 현실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박군’은 우리 모두가 ‘어떤 험악한 제도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회 제도의 변혁을 위해 ‘xx단’(무장독립운동단체로 추정)에 가입하게 된다. 소설은 이러한 과정을 ‘김군’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서간체 소설은 화자의 경험과 심경을 그대로 전달하는 효과를 주는데 이 소설에서도 ‘박군’의 비참한 생활고가 생생하게 느껴지고, 가족을 버리고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심경이 호소력을 갖는다.
최서해는 <탈출기>로 당시 문단에 큰 충격을 준 데 이어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 등을 발표하며 ‘무산 계급 문예’를 대표하는 작가가 된다. 이후로도 <홍염> 등 여러 단편을 썼는데 대부분 ‘가난한 주인공이 사회 제도를 저주하며 부자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로 도식화될 수 있는 소설들이어서 초기작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최서해의 소설은 이데올로기만 내세운 관념적 소설이 아니라 작가적 체험과 구체적 현실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최서해의 <탈출기>가 있었기에 이기영의 <고향>이나 한설야의 <황혼> 같은 문학적 완성도를 갖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 오랜만에 글을 쓰려고 했는데, 새글쓰기를 눌러도 계속 2년 전에 올렸던 글이 남아있어서 쓰기 눌렀더니 그대로 글이 올라갔습니다. 뭐 좀 하려고 하면 꼭 장애물에 가로막히네요ㅠㅠ 새글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