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이야기 3-1

in #kr7 years ago (edited)

대학시절 격주로 과내 소식지를 발간하는 일을 맡아서 했는데 제호가 ‘진흙과 통나무’였다. 명맥이 끊긴 과내 소식지를 다시 내기로 하면서 제호를 고민하던 중 당시 고학번이던 모 선배가 지어준 것이었다. 창간호에 그 의미를 실었는데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진흙과 통나무’처럼 여러 모로 쓸모 있고 오래 가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과내 구성원들에게 받은 원고를 편집부에서 일일이 타이핑하고 출력해서 B4 용지 한면에 2페이지씩 잘라 붙여 총 24페이지의 원본을 만든 후 100부를 복사하고 철해서 배포했다.

지금 내 스크랩북에 단 한권의 ‘진흙과 통나무’ 원본이 남아있는데 그 안에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쓴 글이 실려 있다. 지금은 시골마을에서 경찰 노릇을 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는 친구인데, 학창시절 그는 광적인 음악 애호가였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음악을 들어서 팝송 가사로 영어공부를 했다는 그의 자취방에는 그동안 수집한 LP와 카세트테이프가 책장 가득 꽂혀 있었다. 내가 놀러 가면 턴테이블에 여러 장의 LP판을 갈아 끼워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곤 했는데, 사실 나는 그때까지 음악 특히 팝송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어서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그가 틀어준 노래 중에서 좋아하고 부르기까지 한 팝송, 그것도 락이 있었으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서 쓰겠다)

친구는 음악을 좋아하는 몇몇 선후배들과 함께 음악 감상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동아리의 이름은 ‘뚫린 귀’였다. 전임교수님 한분이 음악을 좋아하셔서 연구실에 소위 하이엔드 음향장비를 갖추고 계셨고, 친구가 교수님께 허락을 받아 저녁시간에 그곳에 모여 음악을 듣는 동아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진흙과 통나무’에 실린 친구의 글에 바로 그 ‘뚫린 귀’ 모임의 취지가 담겨 있기에 인용해본다. 인용의 가부를 친구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기꺼이 허락해주리라 생각한다.

[… 혹시 여러분들은 뚫린 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 뚫린 귀는 문창과 내의 음악 동호인 집단이다. 지난주에 가진 첫 모임에서 우리는 모임의 취지를 넓은 음악적 이해와 그 이해를 통한 오지랖 넓히기라고 잠정 합의하였다. 일단 형식적으로 그런 목표를 제시했지만 구성원들은 제각각의 의미를 부여했을 거라 여겨진다. 뚫린 귀는 결코 전문적 음악 모임이 아니며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 소리에 대해 귀 기울이는 자세를 습득하고 그 소리로 우리 주변을 둘러보고 이해하며 비판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현재적 삶에 충실하기란 어떤 걸 통해서도 가능하리라. 음악을 통해서 엿보는 세상도 독특한 의미를 가질 거라 확신한다. 우리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으려 한다. 크게 ROCK, JAZZ, 한국 음악으로 삼분하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세분화할 생각이다. 그동안 ROCK과 JAZZ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는지는 결코 중요치 않다. 외형적으로 그것들은 부정적 시각으로 싸여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은 철저히 제도권적이고 보수적인 것이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반박하고 싶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의 음악(대중음악이 주류를 이룰 것이다)의 역할과 의미를 돌이켜 생각해 볼 것이다. 쾌락과 안락의 도구로서, 대중문화 산업의 병폐적 상업주의의 일환으로서, 정치에의 무관심을 조장하는 수단으로서 작용했을 법한 음악을 제 위치에 복귀시킬 것을 과제로 삼을 것이다.…]

모임의 취지와 방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명문장이다. 제일 많이 듣고 부르는 음악이 운동가요이고 서태지의 ‘난 알아요’를 부를 줄 아는 학생이 몇 안됐던 문창과에서, 락과 재즈를 듣는 ‘뚫린 귀’가 아웃사이더들의 모임으로 치부되는 데 대한 섭섭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친구가 그런 의도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문학’이든 ‘음악’이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을 해석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두번 교수님 방에서 각자 가져온 음악을 함께 들으며 모임을 이어나갔다. 친구가 몇 번이나 ‘뚫린 귀’에 초대했지만 나는 ‘진흙과 통나무’를 만들어야 한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진흙과 통나무’와 ‘뚫린 귀’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독특한 작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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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r Up! 음~? 흥미로운 포스팅이군요.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새벽에 글 올리셔서
창 열고 들어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좋은 금요일 되세요.

보팅하고 갑니다
보팅이 뭔줄 몰르다가
이제 보팅을 아네요

감사합니다.
스팀잇 하신지 저보다 오래되셨는데 이제 보팅을 아시다니...
팔로우하고 글도 챙겨보겠습니다^^

@storysharing This is actually some incredible fun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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